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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n 26. 2024

울 엄마도 아픕니다

   이발만 해달랬지 속눈썹까지 왜 깎아서 늙은이 눈도 못 뜨게 고생을 시키냐는 게 항의의 골자다. 노인이 깎새 점방을 몇 번 찾긴 했다. 낯이 익긴 하지만 최근 한 달 사이 노인 머리 깎은 기억은 없다. 노인 주장에 따르면 보름 전 머리를 깎으면서 깎새가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었다면서 입에 게거품까지 물었다. 하지만 노인 항의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손님이 요구하지 않는 한 깎새가 오지랖 넓게 손님 눈썹을 알아서 깎진 않는다. 눈썹 깎았다간 복 달아난다는 미신을 굳게 믿는 손님이 적지 않아서 자발적으로 욕 들어먹을 바보는 없다. 차라리 제 발로 호랑이 굴에 들어가면 몰라도. 그걸 잘 아는지라 그냥 눈썹도 아니고 속눈썹을 손님 모르게 깎았다는 주장이야말로 어불성설인데다 그런 짓을 자행할 만큼 겁대가리를 상실한 깎새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데 깎새 오른팔과 전 재산을 걸 자신이 있다. 

   하지만 아침 7시 개점하자마자 들이닥쳐 우기기 시작한 노인(실은 30분 전에도 문을 박차고 들어오려는 걸 급똥 신호가 온 깎새가 점방 문을 잠갔으니 망정이지)은 아침 댓바람부터 난리법석을 떤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기 전까지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는 신념인지 꼼짝달싹을 안 했다. 근데 좀 이상했다. 손님이 클레임을 걸었으면 그 반대급부를 노리는 게 당연한데 그게 좀 모호했다. 우기는 김에 깎새를 무릎 꿇게 해 용서를 빌게 한다든지 전에 지불한 커트값을 돌려 받는달지 하는 구체적인 요구가 전혀 없었다. 그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해 우기면서 깎새와 평행선을 달릴 뿐.

   도저히 결론이 나지 않을 게임일 거란 당혹감에다 마수도 하기 전에 기운까지 쏙 빠져서는 일진이 사납겠다 싶어 긴급하게 112 전화를 걸었다. 5분 남짓 경찰을 기다리는 동안 노인은 갑자기 수굿해졌다. 

   - 면도하면서 속눈썹을 안 깎았단 말이지?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리가 갑자기 왜 또 출현하나 싶어서,

   - 어르신, 커트점에서는 이발만 해주지 면도는 안 해요. 했다가는 잡혀 들어가요. 당연히 면도를 안 하니 속눈썹도 깎았을 리 없구요. 그건 그렇고, 면도는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옵니까? 

   - 아니면 아닌 거지. 내가 착각했나 보네. 나 그냥 집에 갈래.

   - 경찰 불렀는데 가긴 어딜 가요? 조사는 받고 가야지.

   경찰이 출동하자 노인은 꼬리를 완전히 내렸다. 자기가 크게 착각했다, 여기가 아닌가 보다며 순순히 물러나는 게 아닌가. 노인과 면담한 경찰이 깎새한테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 여든 넘은 어르신이 치매기가 좀 엿보입니다. 원장님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폐점을 얼마 안 남긴 오후 나절, 비타민 드링크 박스를 들고 그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침 댓바람부터 난리를 친 노인을 타인의 조언에 절대 귀 기울이지 않고 융통성 없으며 유연하지도 않아 고집만 센 탓에 혐오의 대상으로 전락한 (전부는 아니지만)요즘 노인상처럼 고약한 저의를 품고 깎새를 골탕 먹이려는 꼴통으로 끝내 단정지었을 게다. 

   - 머리 깎으러 온 건 아니고요. 아침에 좀 시끄러웠다고 들었습니다. 

   - 무슨 용무로?

   - 그 분 아들입니다. 아침에 바로 찾아 뵀어야 하는데 다른 급한 일 때문에 많이 늦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드링크 박스를 건넨다.)

   - 아니,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 부친께서는 치료를 받는 중이십니다. 근래 들어 못마땅한 게 생기면 거기에 꽂혀 다혈질적으로 변해 주위 분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합니다. 주의를 하는데도 또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 느닷없어서 좀 황당하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습니다. 괘념치 마세요.

   다소곳하게 사과를 마치고 점방 문을 나서는 나이 든 아들 뒷모습을 보면서 깎새는 중얼거렸다.

   울 엄마도 아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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