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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n 28. 2024

사진 속 저의

   그럴듯하게 찍힌 사진을 보면서 프레임에 격납된 형상 그 자체에 우선 매료된다. 이른바 포토샵이라는 허황한 편집술로 실체와 허상을 분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어도 본연한 실체는 부정될 수 없기에 변조됐을망정 본질까지 왜곡시킬 순 없다.

   언감생심, 문외한 주제에 사진 미학을 논하랴. 다만 눈에 비친 피사체의 적나라한 객관성에 몰입하고 희열하다가 불현듯 그 대상에 드리워진 표리부동성을 꿰뚫어 그 이면을 보는 지혜를 사진이란 매개물로 길러지길 바랄 뿐이다. 

   너무 거창한 잡소리 같은가? 그렇다 해도 하는 수 없다. 좌고우면하는 비루한 습성이 고질이 된 지 좀 됐다. 그로 인해 현상을 보편타당하게 직시하지 못하는 감각의 불구는 치명적이다. 하여 사진 보기는 치우친 걸 바로잡아 중심을 잡게 하는 일종의 재활 훈련으로는 그만이다. 어떤 사진을 뚫어지게 보는 걸 목격한다면, 저 녀석 지금 훈련 중이라고 여겨주면 고맙겠다. 

   사진 예술은 흥미롭다. 한 장의 사진은 피사체와 그 피사체를 찍은 인물, 그리고 사진에서 보여지는 모양, 색깔, 위치 따위의 짜임, 즉 사진 구도가 긴밀하고 유기적인 관계를 맺어 빚어내는 이야기로 읽힌다. 하여 사진 속 깃들어 있는 사연이 그걸 바라보는 이에게 끊임없이 말 걸어오는 언어 혹은 신호를 선명하게 해독해낼 수만 있다면 바야흐로 통찰력이란 수퍼 파워를 획득하는 것이다. 

   막내딸이 찍었다는 사진을 지그시 보고 있는 중이다. 그냥 이뻐서 찍었다지만 녀석은 곧잘 사진으로 모종의 신호를 보낸다는 걸 눈치챈 지 좀 됐다. 기말시험 준비가 벅찬 나머지 사라지는 석양 속으로 고된 심사를 밀어넣고 싶었던 것일까, 아니면 가뭇없이 사라져가는 노을을 용돈 떨어져 먼지만 풀풀 날리는 제 지갑에다 비유하고 싶어서일까. 찍었으면 고이 제 사진첩에 모셔둘 일이지 카톡으로 보낸 저의를 살피느라 머리깨나 굴리는 깎새다. 


   사진은 객관적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화가처럼 대상을 주관적으로 미화하거나 기량 부족이나 기벽 탓에 대상을 왜곡할 위험이 없다는 뜻이다. 기계적 공정으로서의 사진은 세계와 모종의 직접적, 반영적 관계에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세계를 객관적으로 보여 주겠다는 약속이다. 여러 유럽어에서 ‘렌즈’를 뜻하는 단어, 예를 들어 독일어 Objektive, 프랑스어 objectif, 이탈리아어 objettivo는 ‘앞에 놓여 있음’을 뜻하는 라틴어 objectus와 연결되어 있다. 렌즈의 속성에 불과한 ‘객관objectivity’이 역사적 진실, 특정 시공간의 진실을 보장한다는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뜻이다. (발터 벤야민, 『발터 벤야민, 사진에 대하여』, 에스터 레슬리 엮음, 김정아 옮김, 위즈덤하우스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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