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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l 23. 2024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

   나른한 일요일 대낮, TV에서는 영화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이 한창이었다. 유명짜한 영화배우의 리즈 시절을 되돌아보는 코너에 심은하가 등장하자 염색약을 바르고 대기하던 손님 왈,

   "심은하하면 <M>밖에 안 떠올라요."

   "나는 <8월의 크리스마스>."

   깎새 말이 떨어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화면은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 장면으로 바뀌고 영화의 시그니처라고 할 사진관이 보이는 낯익은 동네 전경이 나타났다. 

   "군산 어디쯤이라던데 다시 봐도 정겹네요. 그 동네 아직도 있나 몰라."

   "아직도 분명히 있습니다."

   대번에 잘라 말하는 손님이 신기해서 말꼬리를 잡아챘다.

   "최근에 가봐서 잘 아시는갑네."

   "거기 있는 대학을 나와서 잘 압니다."

   그러고 보니 부산 짠내가 별로 안 나는 말투더라구. 군산에서 대학 생활 마치고 어쩌다 부산으로 넘어와 10년째 살고 있다는 손님은 부산에 적을 두지만 정서는 여전히 그곳으로 향하고 있댔다.

   "거기서 학교를 나왔으면 군산 토박이이신가?"

   "고향은 정읍입니다."

   전남 광주를 기반으로 한 생명보험회사 서울 본사에서 직장인 첫발을 내디딘 덕분에 전국구 단위로 사회 생활을 할 수 있었고 당연하게도 전라도 출신과 애로 없이 교류를 가질 수 있었다. 그 당시를 좋은 기억으로 품고 사는 깎새로서는 정읍 출신 손님과 전라도를 말밑천 삼아 나눌 얘기가 참 많았지만 눈치도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오는 손님들로 말문이 막히는 바람에 아쉽지만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다. 

   머리 행굴 시간이 돼 막 감기려는데 속엣말이 남았다는 듯 툭 내뱉는 손님.

   "이 곳 부산은 왠지 바쁘고 급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만 거기는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라 아늑하답니다." 

   '부산이 달리 부산이라 부를까. 부산스러우니까 부산이지' 맞장구를 치려다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라는 표현에 비하면 하찮게 여겨져 관두기로 했다. 대신 잊고 있었던 옛 정경 하나를 소환해서 과연 그 표현과 어울리는지 손님 머리를 감기는 내내 가늠했다. 6년 전이니까 2018년 초가을 무렵, 울적한 심사 달래려고 혼자 전남 화순 운주사로 향했다가 친구 사는 전남 영암에서 하룻밤 묵으려고 55번 지방도를 달리던 중이었다. 가다가 홀린 듯 멈춘 곳이 정확하게 어딘지는 모르겠다. 단지 박제된 활자로만 접하던 나주평야 어디쯤으로 짐작할 뿐. 탁 트인 곡창지대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 광활함은 그 수하로 적막감을 데불고 다니지만 거기선 가을 바람 불어와 목을 간질이는 청량감과 어머니 품처럼 포근한 평화로움이 외로운 여행자를 반겼다. 그러다 모래알 같은 미미한 존재감조차 부질없게 만드는 고요함에 마침내 충만하게 된다. 마치 세상의 시간이란 시간은 모두 멈춘 듯이.

   정읍에서 나고 군산에서 대학을 나왔다는 손님이 군대에서 같이 뺑이를 친 동기인 양 반가웠던 깎새는 꼭 물어보고 싶었으나 밀리는 손님들로 도로 삼킨 말이 있다. 

   "군대 동기 중에 전북대 나온 녀석이 있는데 고향이 정읍이었어요. 김 아무개인데 혹시 아는 사람일까 해서요. 알면 안부 좀 전해 주세요. 우리 제법 잘 어울렸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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