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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Jul 27. 2024

세상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

   사랑은 제로섬 게임이라고 규정짓는 듯한 시가 있다.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 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좋은 기억으로 남건 그 반대건 사랑의 기억이 현재 사랑에 영향을 끼친다면, 시를 관통하는 전반적 기조로 봐선 불길하기 짝이 없는 악영향 같으니, 시인이 읊조리듯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 애인이라 사랑은 허무하다. 하여 사랑하면 불가분해야 한다는 발상이야말로 감상적 탈을 쓴 병적인 집착이 아닐는지. 그 집착이 트라우마로 발현되면 스토킹으로 변질된다. 그러니 제발 사랑한다면(사랑했다면) 떠날 줄도, 놓아줄 줄도 알아야 한다.   

   애타게 찾아 헤매던 사람을 막상 만났지만 이내 샐쭉거리고는 휙 뒤돌아 서서 도망가 버린다. 등을 돌린 사람은 얄궂게도 이루어지지 않은 첫사랑. 제대로 가위 눌린 악몽인 셈이다. 자주 꾸지 않은 탓에 쉽사리 잊혀지지 않는 그런 꿈은 혹시 꿈을 빌어 뭔가를 예지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망상에 정신만 사나워진다. 아직도 그 빌어먹을 연정이란 게 남아 있어 감정이 거세게 소용돌이치는 거라면, 저토록 저급한 코미디가 또 어디 있으랴. 가소롭기 짝이 없다.

   설령 첫사랑의 여운이 말랑말랑 남아 있다 치자. 그걸 쫓는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허황되고 무망한 치기라는 것쯤은 알 만큼 대가리가 이미 크지 않았나. 미련이라는 감정도 쌍방향이어야지 로맨스든 불륜이든 볼 장 다 볼 수 있을 테지만 일방적이라면 스토커나 저지르는 추태나 다름없다.

   반사실적 사고counterfactual thinking란 만약 다른 결정을 내렸다면 현실이 어떻게 변했을지 상상하는 행위다. 만약 그 여자와 헤어지지 않았다면 지금 어떻게 바뀌었을지 상상하는 짓이 좋은 예가 되겠다. 하지만 이 가정은 필연적으로 후회를 동반한다. 그때 그렇게 하지(혹은 되지) 않았다면 하는 후회가 트라우마로 고착되면 좌절이나 불안감을 잉태해 두고두고 사랑을 시험하려 드는 것이다. 그 영향권에서 벗어 나지 못해 허우적대다간 두고두고 가위눌림이나 당하거나 사랑은 허무하다고 군시렁댈 뿐이다.


   너는 들어보지 못했느냐? 옛날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리고 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궐의 음악을 연주해주고, 소와 돼지, 양을 잡아 대접하였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하기만 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결국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자기와 같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 (『장자莊子-지락至樂』에서)


   이 우화에 한 철학자가 이런 토를 달았다.


   장자의 이야기를 읽을 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 등장하는 노나라 임금이 누구나 인정할 만큼 새를 아끼고 사랑했다는 점입니다. 그러나 그의 이런 사랑이 끝내는 자신이 사랑하던 새를 죽음으로 이끌고 맙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어떤 비극적인 분위기가 있습니다. 사랑이 오히려 사랑하는 타자를 죽음으로 내몰았기 때문이지요. 어떤 이유로 인해 이런 비극적인 결말이 나오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노나라 임금이 사랑하는 새에게 좋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 새의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는 치명적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

   결국 우리가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하지 못한다면, 혹은 사랑이 언제나 ‘하나’가 아니라 ‘둘’의 진리라는 사실을 망각한다면, 우리의 사랑 역시 이런 비극으로 끝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강신주, 『철학, 삶을 만나다』, 이학사, 2006, 271~273쪽)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다 보니 집착하는 자마저 파멸에 이르는 역설. 결국 둘이라는 거다. 사람 사이는 자신과 타자와의 차이를 긍정해야만 그 관계가 온전하게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렷다. 그러니 혹시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무의식의 철옹성에 가두고 있다면 미련없이 풀어주는 게 상책이다. 쾌적한 숙면을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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