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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ug 06. 2024

고분고분한 생일

   지난 일요일은 깎새가 집에서 쇠는 음력 생일이다. 전날 동네 월남쌈 음식점에서 네 식구 조촐하게 저녁 식사를 했고 일요일엔 찰밥 올라간 생일상을 받았다. 아이스크림 케이크에 '53' 숫자로 된 초가 올라가자 깜짝 놀라며 현실을 부정했다. 

   "아이야, 이리 마이 묵었을 리 읎서!"

   그나마 올해는 조용하게 넘어간 편이다. 생일 즈음 울적해지는 기분을 다잡기가 참 어려웠던 요 몇 년이었으니까. 왜 그런지 모르겠다. 갑자기 착잡해지다가 귀차니즘의 정점에 이르러선 손 대면 바로 반격을 가하는 앙팡 테리블이 따로없을 지경으로 변한다. 평소라면 심상했을 게 별스러워져 마음을 뒤흔들곤 한다. 허탈하다가 원망스러워졌다 끝내 세상 참 덧없다며 혼자 청승맞게 술잔을 기울이는 꼬락서니란 그런 게 있다면 바로 '생일 증후군'인 셈이다. 작년 이맘때 행적이 떠오른다. 

   유쾌하지 않은 서울살이(1997~2002년)를 그나마 지탱하게 해 준 것 중엔 양평해장국, 을지로골뱅이가 있었다. 서울 신대방동 롯데백화점 가는 길목에 자리잡은 점방에서 먹었던 해장국을 최고로 치고 그 맛을 절대 못 잊는다. 그 점방이 <양평해장국>이라는 브랜드로 운영되는 체인점이었는지는 오래돼서 가물가물하다. 아무려면 어떠랴. 살면서 먹어 본 그 어떤 해장국보다 쓰린 입맛을 달래주는 데 딱이면 그만이지. 당시 다니던 회사가 그 부근이라 점방 문턱이 닳도록 들락거렸다. 숙취로 고생하는 속을 달래러, 점심 끼니 때우러, 퇴근하고 한잔 하러 가고 또 갔다. 선지와 내장, 콩나물이 아낌없이 들어가 어우러진 국물을 한 숟가락 뜨면 맛도 맛이거니와 남 몰래 쌓인 서울살이 울분이 싹 가시는 쾌감에 전율했다. 정이라고는 안 가는 넨장맞을 도시에서 어떡하든지 견뎌내겠다는 의지를 뚝배기 바닥을 벅벅 긁어대는 궁상으로 표출했다면 너무 거창한가. 부산으로 낙향해 양평해장국이란 간판에 속아 음식을 시켰다가 식탁을 엎어 버릴 듯이 치미는 분노를 참느라 여러번 혼난 이후로는 부산에서 양평해장국은 안 먹는다. 그때 그 맛을 바랐던 게 멍청하지. 

   을지로골뱅이는 명동 거기에 아직도 있을까. 해운대 장산역 부근에 <을지로골뱅이> 상호 걸고 성행 중인 점방이 있다. 짝퉁치고는 유서가 깊다. 깎새가 해운대 신시가지에다 터를 잡은 2003년 이전부터 장산역 부근에서 이미 터줏대감 노릇을 하며 골뱅이를 팔고 있었으니 그 시점으로만 쳐도 사반세기에 육박하는 업력이겠다. 서울 명동 근처에 본사가 있던 증권사로 출퇴근하던 동우를 꾀어 술추렴하던 곳은 외환은행 본점 주변 노상이었고 술안주로 먹던 건 주야장천 골뱅이무침이었다. 을지로골뱅이 레시피는 파절이와 황태포(혹은 가자미포)를 듬뿍 넣어 버무리는 게 다다. 거기에 달걀말이가 추가로 따라나올 뿐. 장산역 을지로골뱅이는 명동에서 먹던 본새를 빼다박긴 했다. 허나 원조만이 뿜어내는 아우라에는 미처 범접할 수가 없었는지 대파는 애리고 골뱅이는 흐물흐물하며 나오는 양도 박해 좋은 점수를 못 주겠다. 옛날 기분 내러 가끔 들를 적마다 뒤끝이 허무해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옛날 기분이라고 말은 쉽게 하지만 무척 불감당한 감정의 쓰나미다. 저녁 무렵 동우랑 명동 노상에 퍼질러 앉아 즐기던 골뱅이, 달걀말이, 히야시 만땅인 맥주가 떠오르면 먹거리가 그득하게 차려진 주안상 앞에서 타향살이로 버거웠던 마음의 짐을 잠시 내려놓고 마음껏 웃고 떠들던 청춘 둘도 따라 떠올라 되우 그리우면서 서글프다. 이대로 무미건조해지면 안 되는데.  

   요 몇 년 생일 즈음이면 울적해지는 기분을 다잡지 못한다. 만사가 귀찮아지고 덧없기 짝이 없다. 생일치레야말로 속절없는 인생을 새삼 확인시키는 고통스런 연례행사다. 기념한다고 기뻐하고 행복해야 할 의미가 의미있냐고 묻는다면 "글쎄올시다"이다. 우중충하던 8월 어느 날, 퇴근길 집 대신 장산역 <을지로골뱅이>로 선회했다. 을지로골뱅이를 먹으면 혹시 그때 그 기분이 되살아날까 기대했건만 구석진 자리에 혼자 옹송그리고 자작하는 소주만 엄청 썼다. 밤 10시를 향하던 무렵 동우한테 문자를 보냈다. 을지로골뱅이에 얽힌 추억팔이 문자였다. 동우답게 답신은 짤막했다.

   - 기억 참 좋네. 읽다보니 나도 예전 생각이 나네. 오늘 한잔했나?

   술김에 장황해졌다. 

   - 실은 장산 골뱅이집에서 혼자 한잔 하는 중이다. 그냥 울적하기도 하고 옛날 생각도 나서 집에 못 들어가겠더라구. 내일 일도 해야 하는데, 뭐 어찌 되긋지. 

   잘 지내나? 나도 나이 먹은 티를 팍팍 낸다. 음력 7월 초하루가 생일인데 이상하게 생일만 다가오면 울적해진다. 집에도 들어가기 싫고 마누라가 챙겨 주는 것도 귀찮아. 대신 자꾸 옛날 생각이 밀물처럼 몰려드네. 감당 못 할 만치. 그래서 몹시 마음이 데다.

   그로부터 40분쯤 뒤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 다 먹고 간다. 잘 자라.

   전화를 걸어 간단하게 안부 묻는 게 문자보다 차라리 깔끔했을지 모른다. 무상한 세월은 수다쟁이를 원치 않는다. 그저 고분고분하게 늙어가는 게 모범적인 여생의 본보기이다.

   그나마 올해는 고분고분하게 생일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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