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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ug 08. 2024

파블로프의 개

   백설희의 <봄날은 간다>를 장사익과 최백호 두 노가객이 듀엣으로 절창해 청출어람을 유감없이 발휘할 때 노래도 노래지만 그 노래에 얽힌 추억이 대뜸 떠올라 사람 심금을 한번 더 사정없이 울린다. <봄날이 간다>와 같이 어떤 매개체로 인해 그때 그 사람 혹은 그때 그 장면이 조건반사적으로 떠올라 종소리만 들려도 침을 흘리는 파블로프의 개가 되어 버리는 경험, 당신은 없는가.


   다시 뵙기를 청하자 선생은 국제시장 모처에서 보자셨고 그렇게 며칠이 지난 뒤 재회한 곳이 다찌집인 《함○집》이었다. 말씀은 소탈하셨음에도 깊은 연륜과 기풍이 묻어 나왔다. 맥주를 드시면서 유난히 오늘은 기분이 좋다며 이 인연이 오래도록 계속 이어지길 바란다고 진심으로 바라셨다. 그러다 흥에 겨웠는지 가게 늙은 여주인에게, "이 곳을 뻔질나게 다녔지만 오늘처럼 특별하긴 처음이우. 주인장, 내 실례가 안 되는 선에서 한 곡조 뽑을라는데 괜찮겠수?" 하며 잔잔하게 부르던 노래가〈봄날은 간다〉였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가더라/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구슬픈 가락에 얹힌 애틋한 가사가 듣는 이의 심금을 울렸다. 봄날은 필시 사랑으로 생동하는 청춘임에 틀림없으나 어느덧 덧없이 사라지고 말아서 되씹자니 청승맞은 눈물만 하염없다. 노래를 듣거나 부르면 마음이 짠해진다는 선생은 정작 그 뒷사연은 말을 아끼셨으나 어림짐작할 만하다. 나 또한 소싯적 겪었던 실연이었으니까.

   ​그 뒤로 두어 차례 더 찾아뵈면서 특히 문학, 예술, 철학 방면의 남다른 안목을 접하는 행운을 누렸고 특히 선생은 내게 선물로 한시漢詩 입문서 한 권을 주시면서 그 방면의 길을 터주셨는데 그때 그 책은 여전히 서재 한 귀퉁이에 꽂혀 있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일 년 만에 그 보험회사를 부랴부랴 관둔 뒤로는 선생과 교류도 끊겼다. 실 한 오라기같이 가냘펐을지라도 인연의 끈만은 기어이 잡았어야 했다. 먹고사니즘에 허겁지겁댈갑세 인연까지 내팽개쳐서는 아니 되었다. 교우란 것도 살 만할 때라야 누려 봄직한 허례 정도로만 여기는 치기가 단작스럽다. 만약 그때 소견머리만 똑바로 들었다면 여전히 선생과 《함○집》구석진 테이블에서 맥주잔을 기울이며 선생이 부르는 <봄날은 간다>에 코러스를 넣고 있을지 모를 일이다. 일신의 안위에만 정신이 팔려 실다운 지인 한 명 만나기가 갈수록 어려울 수밖에 없는 요즘 그때를 떠올리면 마음이 저린다. 덧없이 나이는 먹어가는데 한 잔 술에 흉금 터놓을 지인 한 사람 변변찮은 깜냥을 지난날의 업보가 아니면 뭘로 설명할 수 있을지.

   사람이 그리우면 늙는 거라는 우스개소리가 처연하게 들린다. 그리운 사람 차곡차곡 만나고 싶은 요즘이다. 오늘따라 광안대교는 무심히도 휘황찬란하구나.(2014. 06 글에서)


   최근에 파블로프 개로 새삼 변신한 적이 있다. 퇴근길 라디오에서 들리던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 거의 매일 듣는 그  프로그램은 '세상의 모든 음악'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듯 국내 가요와 팝송을 뺀 전 세계 음악 장르를 망라해 들려주기로 유명한데 그날은 국내 가요, 그것도 1961년에 발표한 옛날 가요가 뜬금없이 귓전을 간지럽히는 게 아닌가. 그러자 불쑥 떠오르는 추억 한 장면.

   1995년 한여름. 신참 소대장이 최신 유행가나 흥얼거리다간 체신머리없다고 고참 소대장한테 면박 당하기 딱이다. 다행히 혼자 듣는 걸 즐겨라 해서 그런 불상사는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 유행하던 가요나 팝송이 썩 구미가 안 당기다 보니 아는 바가 별로 없어 소대원들과 친해질 이른바 아이스브레이킹이 궁해 손해를 보는 측면이 없지 않았다. 당시는 김건모, 룰라가 부르는 노래들이 가요계를 주름잡던 시절이었고 훈련이다 진지공사로 고되고 지친 심신을 달래려고 병사들이 부르는 노동요가 다 그것들뿐이라 한두 곡 정도 알아두면 언제고 요긴하게 써먹을 법도 하지만 융통성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신참 소대장은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만다. 

   그러던 어느날, 상급부대가 주최한 훈련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둬 진급에 청신호가 켜진 대대장이 돼지를 잡아 대대 전체 회식을 열었다. 막걸리를 드럼통으로 받아 연병장에서 중대별로 먹고 마시며 즐기는데 소대장더러 한 곡조 뽑으랬다. 가만 보니 동료 소대장들은 이미 최신 유행가로 흥을 돋운 상태라 혼자 빼기도 뭐했다. 이왕 거하게 마신 김에 체신이고 뭐고 숟가락 꽂은 맥주병을 드는 것까진 좋았는데 마땅하게 부를 노래가 떠오르지가 않았다. 김건모 모르고 룰라는 더 모르겠는데 그렇다고 늘어지는 이소라를 부를 텐가 김광진을 열창할거나. 됐고, 뭘 부르든 분위기만 안 조지면 되는 거 아냐. 에라 모르겠다, 툭 던진 게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였다. 

   그런데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스윙 리듬을 탄 노래가 취기에 젖은 부대원들한테 통했는지 따라부르다 춤까지 추니 난리도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 대학 시절로부터 둘째가라면 서러운 기분파였으니 가만히 노래만 불렀을 신참 소대장이 아니지. 대학교 MT 온 것도 아닌데 급기야 부대원들과 엉켜 흔들고 날뛰다가 소위 계급장이 무색해질 뻔했다. 회식이 끝나고 저녁 점호까지 마친 뒤 고참 소대장인 중위가 막사 뒤 음침한 장소로 불러내 한바탕 얼차려를 돌렸다. 체신머리없다고. 

   라디오에서 흘러 나온 <노오란 샤쓰의 사나이>는 한명숙이 부른 게 아니고 한국말을 완벽하게 소화해 낸 프랑스 샹송 가수(이베뜨 지로Yvette Giraud)가 부른 노래였다. 한명숙이 부른 줄 착각하고 옛 추억까지 소환시킬 정도면 대단한 수완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9kubXYqsZq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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