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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ug 09. 2024

마티니스러움

   술에 관해 읽은 책 가운데 언론인이자 칼럼리스트인 고故 심연섭이 쓴 『건배』(중앙m&b, 2006)와 역시 기자 출신 글쟁이 임범이 쓴 『술꾼의 품격』(씨네21북스, 2010)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건배』는 저자가 외국을 다니면서 맛본 술에 얽힌 사연과 소회를 담은 글로벌 술 문화답사기이고, 『술꾼의 품격』은 영화에 등장하는 술에 관한 정보를 영화 이야기와 더불어 흥미롭게 풀어나간 책이다. 

   다만, 『건배』가 심연섭이 작고한 1977년 당시 효문출판사에서 저자가 쓴 재미있는 글들을 모아 출판한 『술 멋 맛』을 저본으로 해 중앙m&b라는 출판사가 2006년 재출판을 한 까닭에 『술꾼의 품격』과는 세월의 간극을 느끼게 하는 대목이 더러 있다. 예를 들어 『술꾼의 품격』에 등장하는, 요새는 일상용어가 된 '폭탄주'란 단어가 『건배』에서는 '버번 위스키가 든 조그만 잔을 안치해놓은 다음, 맥주를 서서히 따라 큰 글라스를 채우는' 보일러 메이커Boiler Maker라는 미국식 제조법이 있다는 정도로만 소개할 뿐 전혀 보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책은 술이라는 공통 관심사를 두고 많은 부분을 공유한다. 특히 마티니란 칵테일에 관한 대목에서는 공히 술이라면 환장을 하는 허풍선이들이 아무말 대잔치를 벌이는 듯해 읽는 재미가 배가한다.


   마티니는 증류주인 진에다 베르무트(와인에 알코올과 허브를 첨가해 만든 리큐르)를 섞어 만드는 칵테일이다. 아마추어들의 마티니가 진과 베르무트 비율을 통상 3대 1 정도로 한다면 프로의 경지에 접근할수록 5대 1, 10대 1, 100대 1로 변한다나. '엑스트라 드라이'라고 하면 100대 1 정도라고 한다. 여기서 드라이dry란 담백하다, 즉 달지 않다는 의미라고 하며 전통적 마티니 애호가들은 그 드라이 마티니를 흔들지 않고, 저어야stirred, not shaken 한다고 주장한단다. 그런 마티니 관습을 뒤집는 일대 사건이 발생한다. 숀 코너리가 1대 제임스 본드로 나온 영화 <007 닥터 노>에서 제임스 본드가 호텔 방에 들어서자 웨이터가 칵테일 셰이커로 흔든 술을 라임이 담긴 잔에 따르며 말한다. "미디엄 드라이 보드카 마티니입니다. 젓지 않고 주문하신 방식대로 섞었습니다."(『술꾼의 품격』, 190~191쪽) 그때까지 술의 상식에 비춰봤을 때 튀어도 너무 튀었다는 얘기.


   다음은 두 책에 등장하는 완고한 전통주의자들의 마티니 제조법이다. 


   헤밍웨이는 통상 3대 1에서 5대 1인 진과 베르무트의 비율을 15대 1로 해서 마셨다. 존슨 대통령은 잔에 베르무트를 따랐다가 비워버리고 그 잔에 진을 따라 마셨다. 나아가 처칠 수상은 차가운 진을 마시면서 베르무트 병을 바라보기만 하는 게 완벽한 마티니라고 했고, 히치콕 감독의 마티니 레시피는 진을 다섯 번 마시고 베르무트 병을 잠깐 흘겨보는 것이다. (위의 책, 191~192쪽)


   원자폭탄까지 동원하는 심연섭은 점입가경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섬이라는 맨해튼의 어느 바에서 외국인 기자 몇 명과 어울렸을 때의 일이다. 어떻게 하면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만들 수 있겠느냐는 것이 화제에 올랐다. 한 친구가 입을 열었다. 

   "옛날 만년필에 잉크를 넣었던 스포이트 생각나나?"

   "그 스포이트로 베르무트 한 방울을 떨어뜨리니까 마티니 맛이 되더군."

   "그것보다는  주사기가 낫지. 가장 가느다란 바늘인 25호 정도면 베르무트 방울을 훨씬 작게 만들 수 있지."

   또 한 친구의 이 비법에 다른 친구가 이의를 제기했다.

   "아내가 향수 뿌리는 분무기 알지? 그걸 빌리는 거야."

   이번에는 듣고만 있던 바텐더가 한마디 거들었다.

   라스베이거스의 어떤 바에 가면 원자原子 마티니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다. 원자폭탄 과학자 중에 마티니 애호가가 있어서 네바다 사막에서 폭발 시험을 할 때 그 폭탄 속에다 베르무트 한 방울을 주입해두었다는 것이다. 원자탄이 폭발할 때, 그 한 방울이 같이 폭발하면서 대기 중에 퍼진다. 그래서 마티니 만들 때 셰이커 뚜껑을 열고 창밖으로 1초 동안 노출시키면 대기 중에 떠돌아다니는 베르무트의 기가 내려앉는다는 설명이었다. 이름 하여, 그것이 바로 '원자 마티니'.(『건배』, 22~23쪽)


   차라리 베르무트를 섞지 말고 진만 알몸으로 마시면 되지 않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에게 심연섭은 말한다. 신사의 체면이 없어도 유분수지, 어찌 벌거숭이 마티니Naked Martini를 마실 수 있겠느냐고. 가장 드라이한 마티니를 만들기 위한 술꾼들의 노력이 가공할 지경이다.

   라디오에서 흐르는 재즈그룹 핑크 마티니Pink Martini의 <Dónde Estás, Yolanda? 어디 있니 요란다?>가 한껏 신명을 돋운다. 마음 같아선 마티니 한 잔 당장 땡기고 싶었지만, 아쉽게도 운전 중이었다. 누가 지었는지 이름 한 번 근사하다. 마티니가 들어가니 여간 마티니스러운 게 아니니 말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I0wGjLP4r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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