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Aug 13. 2024

저기요

   문학평론가인 신형철은 한 칼럼에서 능력에 따른 분배가 곧 정의는 아니라는 주장은 50년 전에 존 롤스에 의해 이미 제기됐다면서 능력이 ‘재능’과 ‘노력’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면 재능은 하필이면 내게 주어진 우연한 선물(gift는 재능이자 선물이다)이어서 공동 자산으로 다루어져야 하며 노력 또한 노력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의 영향을 받을 뿐 아니라, 모든 노력이 다 성공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는 점에서 우연적인 데가 있다고 설파했다. 하여 성공에 대한 보상에 대해서는 무조건적 평등원칙이 아니라 조건적 차등원칙을 적용해야 하되 능력에 힘입은 성공은 장려되고 평가돼야 하지만 그 성과가 과잉 보상일 때 그것이 공동체로 환원되도록 제도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상대를 어떻게 부를 것인지 그 호칭에 대한 제언을 다음과 같이 펼쳤다. 


​   ‘동무’도 사용하지 말란 법이 없지만 현실적으로 ‘선생님’이 낫겠다(이 호칭이 이중 높임이라는 건 일단 차치하자). 이미 쓰고 있지만 더 전면적으로 사용했으면 싶다. 선생先生이란 ‘먼저 살아가는’ 사람이겠는데, 단지 연장자라는 뜻으로 말고,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새기면서 말이다. 당신은, 당신이 살아낸 그 삶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내가 모르는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에게 배울 것이 있다. 판사에게 식당 종업원은 선생님이고 의사에게 아파트 경비원은 선생님이다. 누구나 다른 누구에게 선생이다. 일단 선생님이라 부르고 나면, 최소한 반말을 하거나 때릴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다.(신형철 문학평론가, <누구나 누구에게 선생님>, 경향신문, 2021.01.25에서)


   깎새는 손님을 통상 '선생님'으로 칭한다. 아무리 '손님은 왕'이래도 극존칭으로 굽실거리는 건 기질 상 안 맞고 그렇다고 하대를 하는 건 장사치로서 자기 무덤 자기가 파는 격이라서 제일 만만하면서 무난한 '선생님'으로 통일했던 것이고 그걸로 공연히 시비가 붙은 적은 없다. 하지만 가끔 어색할 때가 없지 않다. 깎새보다 연장자이거나 연배가 엇비슷해야 어울릴 법한 '선생님'을 새파랗게 젊은 치들한테까지 붙이는 건 여간 아닌 과공비례라서.

   칼럼을 읽고 있자니 편해서 부르는 호칭에도 우람한 뜻이 숨어 있어 감탄한다. '내가 살아보지 못한 어떤 삶을 먼저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라···. 살다 보면 그런 뜻을 가진 호칭에 '선생님'을 대신해 '어른' 혹은 '어르신'을 바꿔 쓸 수도 있겠다. 그 호칭에는 앞장선 자만이 내뿜을 수 있는 선구자적 지혜를 바라는 진심어린 존중이 담겨 있음이라. 하지만 웅덩이를 흐리는 미꾸라지마냥 '선생님', '어르신', '어른'을 붙이기 민망하게 교활하고 간교한 술수로 허세를 부리며 노욕을 채우려고 설치는 헛나이만 먹은 치들이 판을 치다 보니 호칭에서 우러나는 숭고한 뜻마저 휴지통에 내다버릴 지경에 이르게 됐다. 하는 행상머리가 고약한 성질머리로 꼴같잖게 무례하고 오만하기 짝이 없이 구는 깎새 점방 늙다리 진상 손님이나 진배없이. 

   마음에도 없으면서 칭호를 높여 대접을 해주느니 묵묵부답으로 제 할 일에만 집중하면 그만이다. 허나 어쩔 수 없이 불러야 한다면 '선생님', '어른', '어르신' 대신 성의는 없는데 그렇게 불렀다고 꼬투리 잡기도 애매한 호명을 쓰기로 한다.  

   "저기요"

작가의 이전글 갱년기를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