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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ug 19. 2024

거부

   그 손님인 줄 직감하자마자 깎새는 커트를 거부하기로 마음먹었다. 태연하게 점방엘 들어와서 도대체 그 때 그 사건이 뭔 대수냐는 식으로 대기석에 털썩 앉고 보는 노인을 향해,

   "어르신, 그냥 돌아가이소. 제가 어르신 머리 깎을 용기가 안 납니더."

   "사람이 어째 그리 꽁하누. 그때 싸운 걸로 끝내야지 여지껏 속에 담아 장사는 어찌 하려구, 쯧쯧."

   "오늘 제가 어르신 머리를 깎았다 칩시데이. 다음날 신새벽에 또 제가 어르신 속눈썹을 깎았다고 어르신이 난리법석을 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습니꺼. 그러면 어쨌든 어르신 머리를 깎은 제가 감당이 불감당인 꼴이 될 텐데 그런 짓을 제가 왜 합니꺼?"

   "그러니까 그때 머리만 깎으면 됐지 왜 남의 속눈썹을 깎아제끼냔 말이야."

   "또 없는 소리 하신다. 그때 제가 어르신 머리를 깎은 적이 없는데 속눈썹을 어떻게 깎습니꺼? 또 머리만 깎으면 됐지 겉눈썹도 아이고 속눈썹을 왜 깎습니꺼? 이치에 맞지도 않는 소리를 왜 또 하십니꺼 입 아프게. 마 가이소. 오늘은 제가 도저히 못 깎겠습니더."

   "아, 사람 참! 그때는 그때고 오늘 그냥 머리만 조용하게 깎아주면 그만이지 뭔 토가 이리 길어."

"어르신, 그날 오후에 아드님이 찾아오셔서 사과까지 하고 갔으면 말 다 한 거 아입니꺼. 제가 이렇게 양해를 드리겠습니더. 나중에 서로 오해하지 않게 그냥 돌아가 주이소 어르신."  

   "정말로 못 깎겠다 이기가. 에이 더러버서, 퉤이."

   먼저 와서 머리를 깎던 손님은 영문을 몰라 당황스러워하는 낯빛이 역력했고 깎새는 신세 타령하듯 저간의 사정을 밝혔다. 


   6월 이맘때였다. 이발만 해달랬지 속눈썹까지 왜 깎아서 늙은이 눈도 못 뜨게 고생을 시키냐는 게 항의의 골자였다. 노인이 깎새 점방을 몇 번 오긴 했었다. 낯이 익지만 최근 한두 달 사이 노인 머리 깎은 기억은 없었다. 노인 주장에 따르면 보름 전 머리를 깎으면서 깎새가 쓸데없는 친절을 베풀었다면서 입에 게거품까지 물었다. 하지만 노인 항의에는 이치에 맞지 않는 심각한 오류가 있었다. 

   손님이 요구하지 않는 한 깎새가 오지랖 넓게도 손님 눈썹을 알아서 깎진 않는다. 눈썹 깎았다간 복 달아난다는 미신을 굳게 믿는 손님이 적지 않아서 과잉친절로 욕 들어먹을 바보 깎새는 없다. 그러니 겉눈썹도 아니고 속눈썹을 손님 모르게 깎았다는 주장이야말로 어불성설이고 그런 무모한 짓을 자행할 만큼 겁대가리를 상실한 깎새는 이 세상에 단 한 명도 없다는 데 깎새 오른팔과 전 재산을 걸겠다. 

   아침 7시 점방 문을 열자마자 들이닥쳐서 마구 우기는 노인은 식전 댓바람부터 난리법석을 떤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기 전까지는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는 신념인 양 꼼짝달싹을 안 했다. 하지만 좀 이상한 건 손님이 클레임을 걸 때는 그 반대급부를 노리는 게 당연한데 그게 좀 모호했다. 우기는 김에 깎새를 무릎 꿇게 해 용서를 빌게 한다든지 전에 지불한 커트값을 돌려 받는달지 하는 구체적인 요구가 전혀 없었다. 그저 똑같은 말만 되풀이해서 우기기에만 급급한 나머지 도저히 접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결론이 결코 나지 않을 게임이란 걸 직감하자 당혹스러웠다. 마수도 하기 전에 기운부터 빠져서는 그날 일진이 사납겠다 싶어 112로 곧장 연락했다. 출동한 경찰을 기다리는 사이 노인은 갑자기 수굿해졌다. 

   "면도하면서 속눈썹을 안 깎았다 이 말이제?"

   이건 또 웬 자다가 봉창 뚜딜기는 소린가 싶어서,

   "어르신, 제 커트점에서는 이발만 해주지 면도는 아예 안 합니더. 면도를 안 하니 당연히 속눈썹 깎았을 리도 없고예. 그건 그렇고, 면도 얘기는 갑자기 여기서 왜 나옵니꺼?"

   "아니면 아닌 거지. 내가 착각했나 보네. 나 그냥 집에 갈래."

   "경찰 불렀는데 가긴 어딜 간다는 말입니꺼? 조사는 받고 가야지."

   경찰이 출동하자 노인은 꼬리를 완전히 내렸다. 자기가 크게 착각했다, 여기가 아닌가 보다며 순순히 물러나려 했다. 노인을 면담한 경찰이 깎새한테 한 쪽 눈을 찡긋거리면서,

   "여든 넘은 어르신이 치매기가 좀 엿보입니다. 원장님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그날 늦은 오후 막 점방 문을 닫으려는데, 비타민 드링크 박스를 들고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머리 깎으러 온 건 아니고요. 아침에 좀 시끄러웠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용무로?"

   "그 분 아들입니다. 아침에 바로 찾아 뵀어야 하는데 다른 급한 일 때문에 많이 늦었습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 (드링크 박스를 건넸다.)"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는 없는데."

   "부친께서는 치료를 받는 중이십니다. 근래 들어 못마땅한 게 생기면 거기에 꽂혀 다혈질적으로 변해 주위 분들을 곤경에 빠뜨리곤 합니다. 주의를 하는데도 또 불미스런 일이 발생했습니다. 너그럽게 용서해 주십시오."

   "느닷없어서 좀 황당하긴 했지만 지금은 괜찮십니더. 괘념치 마이소."


   서로 오해 살 짓은 미연에 방지하는 게 좋겠다는 명분이었지만 실은 일회성으로 안 끝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때문에 극구 노인을 돌려보냈다. 아픈 노인을 배려하기에는 너무 지쳐 버린 깎새였다. 태양이 눈부셔서 사람을 죽였다는 뫼르소까진 아니지만 8월 한여름은 극렬했고 인정에 냉담해진들 가책을 전혀 못 느낄 만치 사람이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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