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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Aug 20. 2024

묵언수행

   고등학교 시절 불교반 동아리는 방학이면 사찰로 가 수련회 행사를 가지곤 했었다. 고3 대입 시험을 마친 뒤 거길 따라가서는 무턱대고 묵언수행默言修行이라는 걸 자청했었다. 뜻을 풀어보자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하는 참선으로 말을 함으로써 짓는 온갖 죄업을 짓지 않고 스스로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한 목적이다. 무슨 바람이 불어 그 어려운 걸 자청했는지 암만 돌이켜봐도 모르겠고 마침 원하는 대학에 합격한 걸 확인하자마자 저절로 입이 터지는 바람에 수행을 깬 흑역사가 있다. 예나 이제나 터진 입이 문제였다. 

   선승 료칸은 '말에 관한 계율'을 다음과 같이 설파했다. 


   수행자여!  세 치 혀를 항상 주의하라.!

   1. 말이 너무 많은 것

   2. 이야기가 너무 긴 것

   3. 자기 자랑을 늘어놓는 것

   4. 제 집안이나 출신을 자랑하는 것

   5. 남의 말 도중에 끼어드는 것

   6. 쉽게 약속을 하는 것

   7. 친구에게 선물을 주기도 전에 먼저 말로 설레발치는 것

   8. 가난한 이에 선물하고, 그걸 남들에게 자랑삼아 떠드는 것

   9.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남을 가르치는 것

   10. 슬픈 사람 곁에서 웃고 노래하는 것

   11. 친구가 숨기고픈 일을 폭로하는 것

   12. 자기보다 아랫사람을 막 대하는 것

   13. 마음에도 없는 말을 쉽게 내뱉는 것​


​   료칸이 하이쿠俳句에 능했던 건 무소유와 고행에 철저했던 삶을 통해 말의 부질없음을 깨달았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한다. 굳이 말을 해야 한다면 5•7•5 17음으로 이루어진 단시, 즉 하이쿠로도 충분하다는.


​   지는 벚꽃

   남은 벚꽃도

   지는 벚꽃​


​   남은 벚꽃조차 머잖아 지는 숙명을 타고 났음이 개선장군 행렬 뒤에서 노예가 외쳤다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를 연상시킨다. '너무 우쭐대지 마라. 너도 언젠가는 죽는다'를 17음에 담아냈으니 하이쿠가 순간의 미학이라 할 만하다.

   대놓고 벌이는 설전까지는 아니지만 말에 서린 날카로운 뼈가 서로 부딪혀 손님과 감정 상하는 일이 잦다. 원인을 누가 제공했느냐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말이 섞이다 보면 안 해도 될 말을 괜히 덧붙여 탈이 나는 법이니 누구든 적정선을 넘어가기 전에 먼저 끊었어야 했다. 요는 한번 터지면 잠궈지지 않는 입방정을 탓할 수밖에 없는 깎새다. 

   료칸이 제시한 계율을 모두 주의할라치면 입을 아예 닫고 살며 철저한 금욕주의자가 되는 편이 나을 게다. 고등학교 불교반 시절 묵언수행이 불쑥 떠오르는 건 결국 세 치 혀가 본질적 문제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아서다. 수행이 필요한 성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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