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대일 Aug 24. 2024

라이터 빌리기

   - 라이터 좀 빌립시다.

   - 죄송하지만 비치한 게 없습니다.

   - 그럼 성냥이라도···.

   - (라이터가 없는데 성냥이 있을 리 없잖아, 이 정신머리없는 손님아!) 죄송합니다. 그것도 안 키웁니다.

   담배를 끊은 이후로 주변에서 완전히 사라진 것 중 라이터를 비롯한 점화 기구가 있다. 생일 케이크 살 때 딸려오는 성냥이 부엌 찬장 속에 격납된 게 없지 않겠으나 묵혀둔 탓에 누져 안 켜지는 무용지물로 전락해 눈에 보이는 족족 갖다 버리기 일쑤다. 불 붙일 일이 없으니 점화 기구를 다루는 데 서툰 식구들이다. 일례로 생일 케이크 위에다 초는 꽂으면서도 정작 불을 붙이려 성냥을 켜는 건 다들 무섭다며 아비한테 다 미룬다. 아비 생일일 때도 예외없이 말이다. 성냥 켜기가 무서운데 라이터는 어찌 켜누. 아무튼 인류가 만든 여러 문명의 이기 중 깎새 집안에서만큼은 애물단지로 취급받는 건 라이터, 성냥 따위 점화 기구인 셈이다. 

   라이터 라이터 하니까 부싯돌 불이 번쩍 일어나듯 옛 추억 하나가 불쑥 떠오른다. 철딱서니는 물 말아 잡순 사내 녀석들도 따라 어른거리면서.

   깎새가 다녔던 대학교는 산을 깎아서 건물을 올리는 통에 대운동장이 산중턱에 걸터앉아 있다. 대운동장 바로 아래로 학생회관이, 학생회관 아래로 화학관이, 화학관 아래로 하드코트가 여러 개 구비되어 있는 테니스장이 위용을 자랑했다. 교내 땅이란 땅에다 새 건물 짓는 걸 지상 최대 과제로 여긴, 탐욕스런 건설업자를 닮은 교내 관계자들 눈에는 그 테니스장 역시 유휴지로밖엔 안 보여서인지 예전 모습을 거의 잠식당한 지 오래다. 

   깎새 재학 시절 테니스장은 한가운데에는 마치 공항 관제탑처럼 생긴 3층 높이의 건물이 우뚝 솟아 있었다. 테니스를 칠 줄 몰라 그 건물 용도가 뭔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만 남았었다. 골프장 클럽하우스 같은 곳이라고 하기엔 조붓하고 옷장 같은 걸 본 적 없어서 탈의실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그 곳은 교내에서 대운동장을 위시해 해발 높은 건물들이 다 그렇듯 해가 서산에 뉘엿뉘엿 넘어갈 즈음이면 인적이 딱 끊겨 을씨년스러운 풍경을 자아내곤 했다. 은밀할수록 대담해지는 아베크족의 야간 데이트 장소라면 모를까 부러 그 높고 먼 곳까지 오밤중에 올라올 일은 별로 없었다.

   하루는 깎새를 포함한 몇몇 91학번 신입생 일당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한밤중에 하고많은 건물 중에 테니스장 관제탑에 기어들어간 짓은 어처구니가 없었는데 이후에 벌인 행각은 더 엽기적이었다. 오후 강의를 제끼고 퍼마신 낮술로 불콰해진 동문 동아리 남자 동기 몇몇은 한 잔 더가 아쉬워 입맛만 다셨다. 집에 갈 차비 말고는 다들 빈털터리였지만 이대로는 못 간다며 머리 맞대고 작당 모의했을 것이다. 그러다 한 녀석이 알 만한 사람한테 돈을 빌려 술을 조달하겠다고 나섰고 녀석의 노고를 최대한 줄여 주겠답시고 택한 접선 장소가 테니스장 관제탑이었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술을 조달하겠다는 녀석은 법대생이었고 법학관을 뒤지다 안면 있는 동기나 선후배와 조우하면 곧장 삐대겠다는 심산이었을 게다. 테니스장에서 오른편으로 한 50m 가량만 걸어 가면 법학관이었으니까.

   얼마나 기다렸을까. 녀석은 함부로 굴러 다니는 걸 주워 온 듯한 손바닥만한 '캪틴큐' 한 병을 주머니에서 주섬주섬 꺼내서는 돌려가며 마시자고 했다. 그렇게 테니스장 관제탑 벽에 기대어 싸구려 양주를 사이좋게 돌려가며 한 모금씩 들이켜다가 싸구려 술도 술은 술인지라 바늘 따라 실 가데끼 담배가 고파 왔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대학 들어와 배운 담배를 그 맛도 잘 모르면서 다들 입에 달고 살았었다. 한 녀석이 담배를 꼬나물자 너 나 할 거 없이 모두 장착했다. 그런데 장대비에 우산도 없이 배회를 한 탓인지 가지고 있던 라이터가 물을 먹었다. 가방을 뒤져 낮술 빤 주점에서 집어 온 성냥을 꺼냈지만 그마저도 습기 때문에 불이 안 붙었다. 당시에는 널리고 널린 게 가게 홍보용 성냥이어서 가방 속에 한두 개 정도는 넣고 다녔고 그것만 전문적으로 모으는 수집광도 제법 많았다. 하여튼 성냥 한 통에 수십 개나 되는 성냥개비를 다 털어 붙여봤지만 점화는커녕 짓이겨지고 닳아빠진 성냥개비들로 주변은 너저분해졌다. 

   아직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사내 녀석들은 위기에 봉착하자 아마 이렇게 전의를 불태웠을 게다. 좌절과 역경의 연속이 인생이라지만 그 파고를 정면으로 맞서 넘어서야지만이 참 행복을 쟁취할 수 있다. 여기서 담뱃불 하나 못 붙이고 포기하면 어렵게 영접한 캪틴큐 씨한테 우사스럽지 않겠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우리 목적을 기필코 달성하자는 뭐 그런 거.

   누군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 비는 그칠 줄 모르는데 담배 한 대를 품 안에 고이 안은 새내기 남학생 하나가 법학관에서 상학관으로 꺾어지는 코너 한 켠을 지키고 섰다가 자동차 한 대가 막 코너를 돌려고 하자 곧장 온몸으로 막아섰다. 깜짝 놀란 운전자(점잖게 생긴 중년 남자였다는 목격으로 봐선 밤 늦게까지 연구에 매진하다 늦은 귀가를 서두르던 고명하신 교수님으로 짐작하는데)가 항의하기도 전에 그 남학생이 먼저 용건을 밝혔다.

   - 담뱃불 좀 빌려 주시면 안 될까요?

작가의 이전글 트라우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