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깎새는 자기 인생 역정에서 굵직굵직했던 터닝포인트에 관해 글을 쓴 적이 있다. 아마 쉰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지난 반세기를 되돌아보고 혹시 모를 선택의 기로에서는 과거의 패착을 되풀이하지 말자는 일종의 반성문을 썼던 모양이었다. 깎새가 그 글을 쓸 4년 전 심정을 속속들이 알 수야 없지만 숙명적이고 패배주의적 관점이 글을 이루는 기조에 일정 부분 지분을 차지했음은 다시 읽어 보면 짐작할 만하다. 깎새가 간과되어 온 <가지 않은 길>의 다른 얼굴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그 기조는 아마도 죽을 때까지 이어지지 않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관점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고 깎새는 반성문을 다시 써봐야겠다는 욕구가 인다. 반성문 말고 신형철 말마따나 인생은 다시 살 수 없지만, 책은 다시 읽을 수 있으니 '여러 갈래의 길이 있었고 남김없이 다 걸어보고픈' 회고록으로 남기겠다는 일념으로 말이다.
아래는 4년 전 글을 옮겼다. 깎새가 이걸 어떻게 바꿀지 참고 기다려 보자.
1. ROTC 지원 vs. 현역 입대
대학 2학년이 막바지였던 1992년 가을 무렵, 내 진로를 처음으로 진지하게 고민했다. 캠퍼스 커플이던 여학생과 같이 졸업하고 싶다는 순진한 발상은 졸업 후 장교 임관이라는 ROTC(학군사관) 제도에 관심을 가지게 했다. 학군 출신 전역장교가 여전히 취업시장에서 상종가를 누리고 있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당시 사귀던 여자는 생각이 달랐다. 대다수 남학생이 그러하듯 현역 복무를 마치고 복학해서 진로를 설계해도 늦지 않다며 지원을 만류했으니까. 그러다 고무신이라도 거꾸로 신게 되면 낙동강 오리알 신세 아니냐는 내 불안감이 우습다는 듯 모질게 마음먹고 꺼낸 말이라고 응수하는 여자의 당돌한 모습까지는 오래된 청춘멜로드라마의 한물 간 장면같이 시답잖다.
여자는 군대라는 계급사회의 맨 밑바닥에서부터 박박 기어가매 고생을 해봐야 근성이 길러지고 난관에 처해서도 의연하게 맞설 수 있는 남자가 될 수 있다며 겉늙은이 티를 팍팍 냈지만 아마도 자기의 미래 배우자라면 갖춰야 할 기본 옵션을 제시한 게 아닐까 싶다.
모르긴 몰라도 그 당시 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있었을 여자가 예나 이제나 사람 좋다는 소리는 들을지언정 강인함과는 거리가 먼 내 섣부른 판단이 마음에 퍽 안 들었음이 분명하다. 만약 여자의 만류에 좀 더 진지하게 고민했다면 이후 상황이 과연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 아무튼 ROTC를 지원한 나는 무난하게 합격했지만 운명의 장난인지 그 여자와는 그로부터 얼마 안 돼 헤어졌다. 교제 기간은 딱 2년이었다.
2. 전역 후 취직 vs. 대학원 진학
정초부터 한보라는 재벌이 빚을 못 갚아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왔고 이후로도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대기업들이 줄줄이 부도가 나던 1997년은 참 뒤숭숭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해 6월 30일까지만 복무하고 중위로 전역할 예정이었다. 선배 장교들이 으레 그랬듯 전역하자마자 곧바로 들어갈 직장을 물색했고 무난하게 취업에 성공한 선배 장교들의 유구한 전철을 그대로 밟을 거라고 낙관했다. 나라까지 부도날 판이라는 진짜 같은 소문이 돌았지만 나라가 무슨 동네 구멍가게냐며 귓등으로도 안 들었다. ROTC 출신 예비 전역장교 우대 조건을 내건 하반기 공채 채용 박람회도 예정대로 열려 취업의 문은 여전히 넓다고 안도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둔하디 둔한 나조차도 전과는 다르게 냉랭해진 그 해 취업 시장의 분위기를 감지하자 불안해졌다. 장교 출신이면 전공 불문하고 우선 채용하던 기준부터 까다로워졌다. 공대 출신이 아니면 비집고 들어갈 기업이 몇 안 되었고 그나마 평판 좋고 인기 높은 회사는 경쟁이 심했다. 그저 그런 스펙(국어국문학 전공, 2점대 후반 학점)을 받아줄 만한 곳은 별로 없었고 당연하게도 지원하는 족족 떨어졌다. 조바심이 났고 괜히 창피했다. 제 깐에는 부산에서는 명문 소리를 듣는다는 국립대를 나왔고 모두가 선망한다는(순전히 나만의 착각이었지만) ROTC 장교 출신이라는 엘리트 의식에 젖어 있던 탓에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울 것으로 여기던 취직은커녕 전혀 갈피를 못 잡고 헤매는 꼴이 죽기보다 싫었던 게다.
뭔가 심상찮다는 걸 감지하셨는지 부친은 세상이 수상하니 전역하면 부산으로 돌아와서 대학원 진학을 타진하는 게 어떠냐는 의사를 넌지시 건네셨다. 대학원은 곧 교육대학원을 의미했고 국어교사로 진로를 변경하는 게 어수선한 시국에는 차라리 상책이라고 하시면서. 당시 부친은 별정직이긴 해도 부산에서 동장洞長으로 활동하시는 중이었고 둔한 나보다야 세상 돌아가는 물정에 훤하셨을 게다. 하지만 나는 부친의 충고를 외면했다. 훈수 두기 좋아하는 곁사람의 오지랖에 넘어간 가방끈 짧은 부친이 남의 속도 모르는 소리를 하신다며 고깝게 여겼다. 뭣보다도 교사는 안중에도 없었다. 교사란 직업은 하는 수 없을 때 꺼내드는 마지막 카드라는 돼먹잖은 인식이 머릿속에 박혀 있던 당시 나로서는 부친이 심사숙고해서 건넨 정보를 온전히 무시한 셈이다. 만약 그때 부친의 권유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면 이후 내 모습은 어떻게 변해 있었을까. 아무튼 나는 아무개 생명보험회사에 어렵사리 합격했고 본사 부서로 배치를 받아 1997년 6월 30일 전역한 다음날인 7월 1일부터 바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3. 퇴사 후 낙향 vs. 계속 근무
회사 동료와 2000년 결혼해 이듬해 큰딸도 낳아 그럭저럭 안정된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하지만 IMF라는 미증유의 국난을 겪은 뒤 급속도로 변해가던 세상은 썩 유쾌해 보이지 않았다. 당장 우리 부부가 다니던 회사만 해도 부실 금융기관으로 낙인 찍혀 장래가 불투명한 지경이었다. 대주주가 경영을 포기한다는 소리가 심심찮게 들려왔고 노조가 생긴 뒤로는 내부 분열까지 가중되었다.
군 복무로부터 이어진 비자발적 객지 생활로 인해 쌓여만 가던 향수병과 지방 촌놈이 살 곳은 아니라는 듯 서울이란 거대도시가 풍기는 도저히 떨쳐지지 않는 위화감이 한데 뒤엉킨 울적함은 날이 갈수록 더했고 한 치 앞도 가늠하기 어려운 회사 사정까지 겹치자 큰딸을 부산 본가에 맡긴 지 일 년이 지난 2002년 여름쯤부터 엉뚱한 생각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 몇몇 외국계 생명보험회사는 그들이 새롭게 들고 나온 마케팅 기법으로 무장시킨 대졸 남성 영업조직을 앞세워 종신보험시장을 선점했고 생명보험업계에 일대 파란을 일으켰다. 어마뜨거라 뒤늦게 뛰어든 국내 보험사들은 유사조직을 만들어 이들을 대응하는 형국이었고. 그런 와중에 부산에서 지역본부 및 산하 지점을 남성 조직으로 새롭게 인큐베이팅하는 중이라는 한 국내 생명보험사가 리쿠르트 제안을 했다. 타이틀만 놓고 보면 전문가 냄새가 물씬 풍기는 종합재무설계사(호칭만 번드르르하지 기실 보험설계사)란 미명보다 부산에서 근무할 수 있다는 제안에 나는 더 혹했다.
아내는 내 의사를 일단 존중해줬다. 대신, 누울 자리를 보고 다리를 뻗으라는 옛말을 단서 조항처럼 달았다. 먼저, 회사 사정이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당장 사표를 내는 게 상책인지는 고심을 더 해봐야 한다. 회생 차원에서 인원 구조조정은 불가피하지만 고액의 위로금을 주는 조건으로 명예퇴직 신청을 받는다는 소문도 들리니 좀 더 기다리는 것도 나쁘지 않다. 보다 신중해야 할 점은, 제안이 들어온 그 보험회사에서 맡을 업무가 적성에 맞는지를 진지하게 따져보자는 거다. 왜 또 하필 보험회사인가. 지금 다니는 회사에서도 적응이 더뎠던 사람이 다른 보험회사라고 더 나을까. 게다가 보험을 판매한 실적을 평가한 수당을 보수로 지급하는 구조라는데 과연 영업이 적성에 맞는지도 신중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시의적절하고 타당한 문제 제기임에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묵살했고 이미 결정을 내렸다며 아퀴를 지어 버렸다. 아무튼 2002년 가을 미련 없이 사표를 던진 나는 아내를 서울에 남겨 두고 혼자 부산으로 향했다.
4. 고수固守 vs. 변화變化
2002년 10월 보험설계사의 길로 접어든 이래 여러 회사를 전전하며 근 13년을 버텼다. 나름 전문성을 갖춰 보려고 당시 선망하던 금융업 관련 자격증도 여럿 취득했지만 정작 수입과 직결되는 영업에는 젬병이었는지 살림살이는 점점 빡빡해졌다. 그렇다고 태세를 바꾸자니 보험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30대 중반에 접어들어 완연하게 자리를 잡은 친구들 몇몇은 아직 늦은 게 아니니 지금 직장보다 안정적인 다른 무엇을 준비하는 게 어떻겠냐며 여러 대안을 제시했지만 설마 산 입에 거미줄 치겠냐며 고사했다. 다른 무엇에 공을 들일 의지나 자신도 없었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지만.
그때 깨달았어야 했다. 암만 훌륭한 정보를 그러모은들 그 속에 감춰진 가능성을 엿볼 줄 아는 통찰력이 없으면 말짱 도루묵이란 걸. 정말 변화를 원한다면 행동은 적시적이고 적극적이어야 하고 희생을 감수하지 않는 변화는 망상이라는 것을. 어차피 긴지 아닌지 판별할 줄도 몰랐을 테지만 스윽 찾아온 몇 번의 호기好機를 놓치자 상황은 더 심각해졌다. 결국 보험 일을 관두고 등 떠밀리듯 팔자에도 없는 요식업에 뛰어들게 된다.
부산 민락동 포구 근처에서 장어나 조개를 구워 먹게 자리를 제공하고 자릿값을 받는 구이집을 운영했다. 재기하겠다는 일념으로 의지를 다졌지만 생짜로 시작한 장사에 수완이 있을 리 없었다. 수지랄 것도 없는 변변찮은 매상도 문제였지만 도와주려는 지인들의 좋은 의도조차 왜곡하며 점점 깊어지는 내 자격지심이 더 큰 장애물이었다. 1년 반 만에 가게를 처분하고 말았다.
조직생활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장교로 복무한 군생활 27개월과 서울 직장생활 5년이 전부인 걸 경륜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각자가 사업 주체라고 여기는 보험설계사 조직에 오랫동안 길들여진 탓에 딱딱한 위계성에 적응하기도 쉽지 않았다. 친한 친구 추천으로 부산 유명한 관광코스라는 해운대 달맞이언덕에 위치한 정규직원만 30명이 넘는 대형 찜질방에 관리과장으로 들앉긴 했지만 중간 실무자라면 반드시 갖춰야 할 조직 장악력은 고사하고 찜질방 건물 운영 업무 전반에 미숙함을 드러내면서 한계를 절감하고 만다. 명분상이야 내부 알력으로 인한 권고사직이었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직무 수행 능력 부재로 인한 자진 퇴장이 더 정확하겠다. 먹고사는 문제에 내몰려 앞뒤 재지 않고 허겁지겁 내린 애초부터 경솔한 선택인 셈이었다.
선택의 갈림길에 섰을 무렵 나를 카메라로 찍어댔다면 매번 비슷한 포즈인 사진들이 현상되었을 게 분명하다. 이미 ‘이것’ 이라고 단정은 지었건만 확신이 별로 없는 나. 그런 내 옆에서 꼭 ‘이것’이어야만 하는지 의문을 제기하고 ‘이것’이 아닌 ‘저것’, '저것'이 아니면 제3의 대안을 제시하면서 망설이지 말고 드넓은 안목의 바다로 뛰어들어 더 넓고 깊게 탐색하기를 주문하는 옛 애인 혹은 아내인 조력자. 하지만 천금같은 조언은 안중에도 없이 계속 저지르기만 하던 나. 그러니 당연하게도 패착의 연속이었고 여기에까지 이르렀다.
내가 결정한 선택은 늘 ‘실패’했다. 실수라는 단어로 대체하기에는 한심한 구석이 많은 꼬락서니라 가당찮다. 이런 내 꼴이 역전할 가망은 거의 없다. 현상을 유지하는 것만이 가족을 도와주는 건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새로운 선택을 꿈꾼다. 물론 앞뒤 재지 않고 판돈을 다 걸었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재현해서는 아니 되고 할 수도 없다. 안전 고리를 단단히 걸고 현 상황보다 조금만 더 호전될 기미를 엿보는 사소하지만 긍정적인 무엇을 찾는 것. 그거라도 하지 않으면 사는 재미를 못 느낄 것 같아서.
다음 주 지자체 9개월짜리 한시직 직업상담사 최종 합격 발표가 어쩌면 내 진로에 분수령이 될지도 모르겠다. 채용이 불발되면 직업상담사로서 유통기한이 지난 것으로 알고 깨끗하게 단념할 작정이다. 이용 기능사 필기시험이 6/29 예정되어 있다. 한 친구가 농담조로 그랬다. ‘글 쓰는 이발사’로 포지셔닝하는 것도 그럴듯해 보인다고. 부친은 가게를 물려받으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신 지가 꽤 되었다. 처자식 먹여 살리는 데 지장이 없는 평생직업이라고. 그 모범답안이 부친이시니 부정할 수 없다. 사라진 열정 자리에 달콤한 안식이 유혹처럼 삐죽삐죽 올라온다. 그럴 나이가 되었다고 하면 너무 퇴영적인가. 하지만 나의 선택은 속절없이 먹어버린 나이만큼 무색했다. 그걸 인정하는 게 버겁지만 그게 또 인생이다.(2020.06.20에 쓴 글)
*직업상담사 채용은 불합격되었다. 곧 이어 이용 기능사 필기시험에 응시해 바로 합격했지만 이후 네 번 고배를 마시고 5수만에 이용 기능사 실기시험에 합격하였다. 해를 넘긴 2021년 9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