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세기를 겨우 넘긴 깎새 인생에서 갈래길 앞에 서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던 적이 의외로 적지 않았다. 그 결과는 거의 예외없이 형편없었지만 말이다. 돌이켜 보건대 신중하지 못한 어설픈 선택이었고 그로 인한 여파는 지독시리 오래갔고 오래가는 중이다. 그래서일까, 낙심했을지언정 그 선택만은 부끄럽지 않다고 짐짓 태연한 척해도 짙게 드리워진 패배주의를 극복하진 못한다.
선택의 기로에서 하나를 고르고 나머지를 버리는 처신을 합리화하기 위해 꼭 드는 게 저 유명한 로버트 프로스트의 <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였다. 이제껏 누구도 가보지 못한 길을 택함으로써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고 시를 해석하자면 그보다 더할 나위 없는 선택의 명분이 없을 게다. 허나, 읽을수록 그 의미가 난해해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중간 구절이 늘 개운치 않았다. 차라리 그 부분만 지워 버리는 게 시를 관통하는 정서에 들어맞는다는 제멋대로 독법까지 자행하기에 이르렀을 정도면 오죽하랴.
가지 않은 길
로버트 프로스트
노란 숲속에 두 갈래 길 나 있어,
나는 둘 다 가지 못하고
하나의 길만 걷는 것 아쉬워
수풀 속으로 굽어 사라지는 길 하나
멀리멀리 한참 서서 바라보았지.
그러고선 똑같이 아름답지만
풀이 우거지고 인적이 없어
아마도 더 끌렸던 다른 길 택했지.
물론 인적으로 치자면, 지나간 발길들로
두 길은 정말 거의 같게 다져져 있었고.
사람들이 시커멓게 밟지 않은 나뭇잎들이
그날 아침 두 길 모두를 한결같이 덮고 있긴 했지만.
아, 나는 한 길을 또다른 날을 위해 남겨두었네!
하지만 길은 길로 이어지는 걸 알기에
내게 다시 오리라 믿지는 않았지.
지금부터 오래오래 후 어디에선가
나는 한숨지으며 이렇게 말하겠지.
숲속에 두 갈래 길이 나 있었다고, 그리고 나는 ―
나는 사람들이 덜 지난 길 택하였고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달라졌노라고.
* (손혜숙 옮김, 『가지 않은 길』, 창비, 2014)
그런데, 그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중간 부분을 신박하게 해석하는 대목을 우연히 발견했고 그건 그야말로 센세이셔널했다. 선택의 기로에 선 두 길에는 사실상 별 차이가 없다는 것,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축하려 할 때 범하게 되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이라는 것. 고스란히 옮겨 보겠다.
그러나 우리는 이 얼룩을 닦아내지 말고 존중하기로 하자. 그러려면 이 시를 처음부터 다시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두 갈래 길 앞에 섰다. 둘 중 하나를 택해야 한다. 화자는 일단 통행이 드물다고 느껴지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내 자신이 상황을 과장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두 길에는 사실상 별 차이가 없음을 밝힌다. 바로 이 순간에 화자는 중요한 진실 하나를 간파했으리라. '우리는 자신의 선택에 필연적인 이유가 있기를 원하고, 또 가능하다면 그 이유가 숭고하고 아름다운 것이기를 바란다는 것,' 그래서 화자는 마지막 연에서 예감한다. 자신이 훗날 이날의 선택을 다소 미화된 방식으로 회상하게 되리라는 것을 말이다.
이제 우리는 전혀 다른 시를 갖게 되었다. 이것이 이 시의 진짜 얼굴이라 단언은 못해도, 최소한, 간과되어온 다른 얼굴 하나가 여기에 있다고 말할 수는 있으리라. 당시의 여느 전원시들처럼 다정하게 삶의 지혜를 말하는 듯 보이지만 실은 은밀한 복화술을 구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프랭크 렌트리키아는 이 시를 "양이 옷을 입은 늑대"(『모더니스트 콰르뎃』)라고 규정한 바 있는데, 10년 뒤 데이비드 오어는 이렇게 단언한다. "이 시는 캔-두 개인주의can-do individualism(나의 선택이 내 인생을 결정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인용자)'에 대한 경의가 아니다. 우리가 우리 인생을 하나의 이야기로 구축하려 할 때 범하게 되는 자기-기만self-deception에 대한 논평이다." (신형철, 『인생의 역사』, 난다, 2022, 244~2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