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가 행방을 감추기 전 낌새를 슬쩍 비췄다는 점에서는 친절한 편이다. 제법 큰 규모를 자랑하는 카센터를 두 군데나 가지고 있는 홀아비를 오지랖 넓은 지인한테서 소개받아 인사치레로 한두 번 만나줬을 뿐인데도 자꾸 치근덕거려 성가시다며 남자 앞에서 무심한 척 푸념을 늘어놓을 때 눈치를 챘어야 했지만 말이다.
어린 딸을 혼자 기르는 돌싱녀에게 경제력은 늘 목전의 난제일 수밖에 없으니 정욕에 사로잡혀 이글거리는 눈빛이 거북하긴 해도 가진 건 돈뿐이라는 홀아비가 현실적인 대안으로 매혹적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여자는 그간 너무 물렁물렁하게 산 탓에 남자에게 준 정을 회수하기가 쉽잖은 자신의 우유부단함에 잠시 고심했더랬다.
남자는 남자대로 그 여자 이전에 맵게 당한 실연의 아픔을 반면교사로 삼아 이 여자와는 기어이 해피엔딩에 이르고야 말겠다고 약이 바짝 오른 상태라 돌싱녀와 홀아비의 공교로운 접촉을 한낱 해프닝으로 치부하기엔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었다. 김중배가 다이아 반지로 여자를 호리듯 홀아비 꿍꿍이야 안 봐도 뻔하다, 그보다 너를 향한 내 마음은 억, 조, 경, 해··· 돈을 헤아리는 단위를 이미 넘어섰다는 위대한 사랑의 힘power of love을 게거품을 물어가매 목놓아 역설했건만 평소 헤실거리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이 무거운 침묵으로만 일관하던 여자. 그렇게 살을 섞은 마지막 밤은 불통이었다. 밤일 치르고 돌아누운 여자의 맨어깨가 자꾸 들썩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것이 회자정리의 애석함일 줄 그땐 미처 몰랐다.
여자가 종적을 감춘 뒤로 또다시 엄습한 배신감과 절망감에 허우적대던 남자 앞에 하루는 외제차 딜러를 하는 후배녀석이 나타났다. 남자와 엮인 관계만 모르고 여자를 잘 아는 후배녀석이 그녀에게 고급 승합차를 팔아 적잖은 실적을 올렸다고 무용담을 늘어놓았다. 돈 많은 홀아비한테 재가해 호사를 누린다는 소문을 듣고 혹시 몰라 찾아갔다가 월척을 물었다며 신나게 씨월거렸다. 아이러니하게도 여자가 고마워지는 남자였다. 비록 여자 입으로 직접 밝히지는 않았지만 남자 곁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까닭을 어쨌든 드러난 셈이니까.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고요한 호수같은 망각에 드리워지면 남자는 어쩔 수 없이 탄식한다. 꼭 그렇게들 떠나야만 했나. 누구나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에 헌신하고 이별을 감행한다. 자기 의지대로 사랑하고 이별했을 뿐인데 그걸 오독誤讀한 댓가가 뼈에 사무친다. 그럼에도 건진 건 있다. 상대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사랑은 깃털보다 가벼운 하찮음이자 쥐어도 쥐어도 흘러내리고 마는 한 줌의 모래일 뿐이라는 걸. 어디 꼭 사랑뿐이겠는가마는.
사랑에 대해서 말할 때 우리는 열정이나 도취에 대해 쉽게 말하지만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완성은 청춘이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 아닐까 가만히 생각해봅니다. 넘치는 것은 젊음뿐, 상대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헤아릴 여유는 조금도 갖지 못해 서로를 오독하는 시기를 지나야 우리는 사랑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해 볼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요. 공고한 '나'의 성을 허물고 타인에게 마침내 자리를 내어줄 때, 사랑은 눈부신 그 폐허에서 시작할 테니까요.(백수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