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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Oct 02. 2024

태연한 절연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나오는 문구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인연이 끊기는 것은 뭔가 구체적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아니, 표면적인 이유가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서로의 마음이 이미 단절된 뒤에 생겨난 것, 나중에 억지로 갖다 붙인 변명 같은 게 아닐까. 마음이 이어져 있다면 인연이 끊길 만한 상황이 되었을 때 누군가는 어떻게든 회복하려 들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이미 인연이 끊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보다 더 건조하다. '둘 이상의 사람, 사물, 현상 따위가 서로 관련을 맺거나 관련이 있음'이라는 뜻을 가진 '관계'임에도 전혀 쌍방향적이지 않다. 인연이 끊길 만한 지경에 이르게 된 걸 감지한 한쪽이 이를 타개해보려는 움직임을 전개한들 반대편에 있는 다른 한쪽이 냉담하거나 상대의 화해 제스처를 알았어도 무시로 일관한다면 말짱 도루묵이다. 그런 식이면 관계를 회복하려는데 왜 혼자서만 애걸복걸해야 하느냐며 빈정까지 상하면서 절연에 가속도는 더 붙는다. 한 이불을 덮고 자던 부부조차 수틀리면 당장이라도 갈라서는 판에 그깟 '알고 지내는' 지인이라는 존재란 격조의 이랑이 깊어질수록 부질없어지는 건 일도 아니다. "사람은 평생에 한 친구면 충분하다. 둘은 많고 셋은 문제가 생긴다"는 말은 그 부질없음에 뒤늦게 실망하지 말라는 경고로써 뼈를 때린다.

   4~5년 전쯤으로 기억한다. 장마가 막 걷히고 역병이 본격적으로 창궐하기 직전일 무렵 일광만 학리 방파제에서 말미잘매운탕을 나눠 먹던 변 형이 꺼낸 말은 차라리 예언이었다.

   - 앞으로 우리가 만나면 몇 번을 더 만나겠니?

   굳이 능동적이고 자발적인 판단에 의해서가 아니더라도 단절은 일어나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세상 하직이라는 극단적 최후로 인해 단절의 시점이 불각시에 당겨지는 경우 말이다. 예언은 들어맞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종종 들어맞을 게다. 멀쩡하던 어떤 형이 하루아침에 유명을 달리하는 비보가 날아들었을 때 단톡방 구성원들 모두는 멘붕을 겪었고 촘촘함과 돈독함을 자랑하던 유대감에 균열이 생기고 만다. 항상 그 자리를 고수했고 앞으로도 그럴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사람이 영영 부재 중이라는 사실을 시시때때로 확인할 적마다 밀려드는 결핍감에 부쩌지를 못하니 관계에 대한 중대한 회의감이 들어 버린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짐짓 회피하던 진실 앞에 기어이 직면하고야 만다. 사람과 사람 사이 맺은 인연을 통해 우리가 느끼는 행복이랄지 환희라는 건 실은 일회적인 쾌락일 뿐 다음을 기약하는 악수 뒤에 밀려드는 허무함이야말로 본질이라는 것을. 

   어쩌면 빠른 단절이 신상에 이로울 수 있다. 쾌도난마로 명쾌하게 절연하는 게 더불어 사는 삶을 파탄내는 자충수임을 감내해서라도 말이다. 단절은 필연적으로 고립을 초래하겠지만 이른바 우정이라는 그물망은 촘촘하게 채워야 제 맛이라는 상투적인 발상 앞에서 소화불량으로 내내 고생하는 것보다야 낫지 않을까 싶다. 멀찌감치 떨어져 태연하게 고독을 벗 삼아 여생을 즐길 줄 아는 훈련이 더 큰 재앙을 막을 최선책이라 자위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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