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OP 추억

by 김대일

지난 토요일 「백 투 더 뮤직」이라는 TV프로에 '일기예보' 멤버였던 나들(박영열)이 출연해 그의 음악 역정을 피력했다. 가을 장마가 들어 손님마저 뚝 끊긴 덕분에 느긋하게 시청할 수 있었는데 <좋아좋아>, <자꾸자꾸> 등 히트곡을 듣다가 난데없이 AOP가 떠올라 나도 순간 생뚱맞았다.

1996년 늦가을에서 초겨울로 접어들 무렵, 강릉에 출몰했던 무장공비들이 아직 다 소탕되지 않았음에도 대대는 GOP에 투입된다. 내가 소속된 중화기중대는 비무장지대(DMZ) 안으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통문(대대 경계지역에는 2개 통문이 있었다)에 2개 소대가, 적의 공중 침투를 감시하는 AOP(Aerial Observation Post 공중감시소/대공관측소)에 나머지 한 개 소대가 투입되어 뿔뿔이 흩어진다. GOP 담당 소총부대와 동거하는 통문 소대는 상급부대의 점검이 수시로 이루어지는 관계로 장병들이 긴장의 끈을 한시도 놓을 수 없다. 그에 반해 고지대에 위치해 고립 생활을 하는 AOP 소대(대공 감시는 GOP보다 약간 후방인 고지대에서 이뤄진다)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다. 그런 고로 AOP 근무가 일종의 땡보직으로 고참 소대장의 전유물로 인식됐는데 당시 중위이면서 중화기중대 내 선임 소대장이기도 했던 내가 자청한 건 당연했다.

한 개 소대만 달랑 주둔해 하는 일이라곤 대공 관측 아니면 제설 작업이 전부이다 보니 심신이 풀어지는 것만큼이나 무료함은 시간이 갈수록 더했다.(투입 후 얼마 동안은 무장공비 소탕하러 수색 및 매복 작전을 간간이 나갔으나 얼마 안 가 월북을 시도하던 마지막 공비가 사살되고 난 이후로는 그마저도 관뒀다. 이후로는 대공 관측 아니면 보급로 확보를 위해 매일 눈 치우는 게 일과의 전부였다) 취사까지 자체적으로 이루어지는 데다 전역까지 기껏 대여섯 달밖에 안 남은 고참 소대장과 그 휘하 부하들의 산정山頂생활은 좋게 표현하자면 노장의 관록이겠으나 아무래도 사람이 할 짓은 못 됐다.

GOP 투입 전에 카세트, 소형 스피커, 테이프 몇 개를 개인 물품으로 챙겨 갔다. 일기예보 2집과 3집 , 이소라 1집, 여행스케치 5집, 더 클래식 2집 따위 입대 후부터 사들였던 당시 신보였다. 들어가면 반 년은 족히 세상과 단절되는 신세. 북쪽에서 들려 오는 가시 박힌 음성을 사랑의 세레나데로 삼지 않는 한 잠시나마 마음을 달달하게 어루만져 줄 뭔가가 필요했다. 살면서 칠흑과 적막이란 단어의 의미를 비로소 알게 해 준 밤마다 2평 남짓 되는 소대장 방에서 이어폰으로 듣는 노래들 덕에 그나마 나는 미치지 않을 수 있었다.

1,200m에 육박하는 고지의 한겨울은 추위와 강풍, 폭설뿐이지만 모처럼 볕 잘 들어 푸근한 어느 날, 양지 바른 곳에 앉아 카세트에 소형 스피커를 달고 볼륨을 최대한 키웠다. 딴에는 소대원들 기분도 풀어줄 겸 선곡한 노래가 일기예보의 <좋아좋아>였지만 반응이 신통치가 않아서 이후로는 소대장 듣고 싶은 노래들로만 주욱 틀었다. 일기예보 <떠나려는 그대를>, 이소라 <처음 느낌 그대로>, 더 클래식 <여우야>, 여행스케치 <눈을 감으면>… 제대로 망중한을 즐기는 소대장 곁으로 분대장이 다가와 "노래가 하나같이 나른합니다." 비꼰다. 나는 대답을 않고 피식 웃기만 했을 거이다. 남녘 하늘이 그날따라 손에 잡힐 듯 가까웠을 테고 거기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혼자 이렇게 궁시렁거렸을지 모른다. '그러게 왜 여자한테 차이고 두고두고 잊지를 못해 소대원들한테 청승맞단 소리나 듣냐고. 내가 생각해도 참 찌질하다. 그나저나 걔는 어떻게 지낼까? 나처럼 걔도 내가 생각날까? 아주 가끔이라도 강원도 외진 곳에 떨어진 나를 그리워해줬으면. 보고 싶다.'

25년 전 일인데도 AOP 정경만은 또렷하다. 추위, 강풍, 폭설, 음식물쓰레기 처리장 주변을 어슬렁거리는 집채만 한 멧돼지와 까마귀, 칠흑같은 어둠과 소음騷音을 소음消音하는 적막, 떠나간 여자와 청승맞은 노래…

사족- 일기예보하면 대체로 <인형의 꿈>, <좋아좋아>, <자꾸자꾸>를 떠올리지만 나는 세 사람이던 시절의 일기예보가 불렀던 <떠나려는 그대를>을 가장 좋아한다. 세 사람의 애절한 하모니가 맹렬하게 질주하다 나를 정면으로 들이받는다. 한 사람보다는 두 사람이, 두 사람보다는 세 사람의 일기예보가 나는 더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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