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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일 Oct 07. 2024

부끄러워 사용하지 않을 뿐

   김해에서 일부러 깎새 점방까지 먼 걸음 하는 손님. 엊그제 점방 문 열고 들어오자마자 바로 옆 카센터 사장님한테 문의할 게 있다며 나가더니 5분 뒤 다시 왔다. 엠블럼에 'V'자와 'W'자가 위 아래로 박힌 외제차를 모는 손님은 배터리 교체를 문의했지만 카센터 사장님이 난색을 표하더란다. 주행 중이던 자동차가 잠시 정차했을 때 자동으로 시동이 꺼졌다가 출발할 때 다시 시동이 걸리는 '공회전 제한 장치(Idle Stop&Go)' 기능이 배터리 명을 재촉하는 주범은 아니지만 어쨌든 방전이 임박해 교체하려는 것인데 장착되어 있는 기존 배터리를 확인한 카센터 사장님이 주저주저하더니 같은 사양의 다른 배터리 가격보다 2배나 더 세게 네고를 해 터무니없더라면서 말이다. 일전에 거기서 엔진오일을 교체했는데 다른 데보다 저렴한 가격에 놀랐던 깎새는 뜬금없는 폭리에 "그럴 리 없는데" 의아스러워했다. 그러자 손님 왈, 외제차이다 보니 교체하고 혹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거추장스러운데다 책임지기는 더 싫어서 일부러 가격을 막 부른 것 같다나. 그나마 아주 방전된 게 아니라서 외제차 직영 서비스센터나 근처 외제차만 전문적으로 다루는 카센터로 끌고 가 볼 작정이라 덧붙였다. 

   자기가 외제차를 몰면서도 손님은 회사가 직접 운영하는 서비스센터가 고객들을 호구로 대하는 작태를 성토했다. 외제차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구실로 청구비용을 뻥튀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이유였다. 2백만 원이 넘는 견적이 터무니없어 일반 카센터에 문의했더니 20만 원이 채 안 나오던 자기 산 경험을 방증 삼아서. 외제차를 몰고 다닐 형편이 못 될 뿐더러 차를 사치품이 아니라 소모품으로 여기다 보니 굳이 값비싼 차를 몰며 부수되는 만만찮은 유지비까지 감당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고, 물론 사람마다 놓인 처지가 다 다르고 생각하는 바도 다 다를 테니 각자 선호하는 차들도 역시 다 다르지 않겠느냐며 엠블럼에 'V'자와 'W'자가 위 아래로 박혀 있는 외제차를 모는 김해 손님 심기를 봐가며 조심스럽게 자기 입장을 밝힌 깎새였다. 

   김해 손님은 머리를 깎는 동안은 별 대응을 안 하다가 커트보를 거두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일장연설을 했다. 사람들이 왜 값이 비싼데도 좋은 차를 선호하는지에 대해서. 우선 들이미는 게 '차로이탈방지' 기능이었다. 요즘 차는 스마트해서 자기 차선이 아닌 차선으로 넘어갈 것 같으면 신호를 보낼 뿐만 아니라 애초에 넘어가지 않도록 적극 개입까지 한단다. 더 나아가 차선 중앙으로 주행이 이어지도록 핸들을 알아서 조정까지 해 준다나. 

   다음으로 역설한 바는 신문 기사에서나 접하던 것이어서 솔직히 무척 신박했는데 '스마트 크루즈 컨트롤 기능'이라는 자동주행 기능이었다. 가속 페달을 밟지 않아도 차량의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고 전방 차량을 감지해 전방차와의 거리를 일정하게 유지시켜 주는 편의 시스템이었다. 덕분에 운전대에서 양손을 놓고 편하게 김밥을 먹으면서 아내와 내장산 여행을 떠났다는 후기담을 늘어놓을 때는 이렇게 좋은 기능을 탑재한 차도 몰아보지 않고서 어떻게 첨단을 달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문명인이라 할 수 있냐고 나무라는 듯해 영 개운치가 않았다. 키를 집어 넣고 돌려야만 시동이 켜지는 차밖에 몰아보지 못한 깎새로서는 야코가 팍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건 당연하고.

   허나 양손에는 김밥을 쳐들고 윤종신의 <고속도로 로맨스>를 불러제끼면서 허구헌 날 고속도로 여행만 일삼을 게 아니라면 그런 신통방통함에 잠깐은 매혹될지 몰라도 얼마 안 가 굳이 그런 차가 무슨 필요가 있을까 하고 변심을 할지 모를 일이다. 50킬로 속도제한에 걸리는 시내도로에서 제아무리 첨단을 달리는 문명의 이기인들 빛 좋은 개살구밖에 더 되겠나 하는 빈정거림이 속에서 들끓기도 했고. 정신 승리로써 열등감을 굴복시키는 이런저런 핑계거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은 알아서 자동적으로 주행할 줄 아는 그야말로 자동차auto-mobile를 열렬히 숭배함으로써 운전대를 잡지 않으려는 인간이 자초한 자기 소외가 탐탁지 않다는 점이다. 이쯤에서 불현듯 『장자莊子』의 한 대목과 그것을 해석한 고故 신영복 선생의 글이 떠올랐다. 『장자莊子』 「천지天地」 편에는 자공이 유람하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밭에 내고 있는 한 노인을 발견한다. 힘은 많이 드나 효과가 별로 없는 노인이 딱해 자공이 용두레(槹)라는 기계를 소개한다. 노력은 적게 들고 효과는 큰(用力甚寡 而見功多) 기계를 소개하자 그 노인은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밭일을 하던 노인은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곧 웃음을 띠고 말했다. 

   "내가 스승에게 들은 것이지만 기계라는 것은 반드시 기계로서의 기능(機事)이 있게 마련이네. 기계의 기능이 있는 한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효율을 생각하는 마음이 자리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된다네(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이 자리를 잃고(神生不定) 생명이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네. 내가 (기계를) 알지 못해서가 아니라 부끄러이 여겨서 기계를 사용하지 않을 뿐이네.


   생산성, 경쟁력, 효율성이라는 신화 속에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장자의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시대착오적인 이야기로 여겨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동양적 가치는 '인성人性의 고양'입니다. 더 많은 생산과 더 많은 소비가 아닙니다. 도의 깨달음과 도의 체득 그리고 합일입니다. 물론 현대의 동양에서는 이미 이러한 가치와 정서를 찾아볼 수 없습니다. 동양의 근대화란 곧 서구화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근대성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 요구되고 있다는 사실이 또한 현대의 특징입니다. 기계에 대한 장자의 주장은 근대성에 대한 반성적 의미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일과 놀이와 학습이 통일된 형태가 가장 바람직한 것임은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기계는 바로 이 통일성을 깨트리는 것이지요. 노동은 그 자체가 삶입니다. 삶의 지출支出이 노동이지요. '지출'이란 단어를 사용하자니 좀 이상합니다. 삶의 '실현'이라고 하지요. 지출보다는 실현이 더 적절한 어휘라 할 수 있습니다. 노동이 삶 그 자체, 삶의 실현임에도 불구하고 기계로 말미암아 노동이 다른 목적의 수단으로 전락되는 것이지요. 노동을 그 본연의 지위로부터 끌어내리는 일을 기계가 하지요.(신영복, 『강의』, 돌베개, 2004, 329~331쪽)


   값비싸고 좋은 차를 몰면서 효율과 편리를 추구하고 과시욕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사람에 대한 지독한 열등감을 옛 고전을 빌어 은폐시키려는 수작이라는 비판이래도 달리 반박할 거리가 없긴 하다. 김해 손님 말마따나 그런 차를 몰아봐야 사람들이 값비싸고 좋은 차를 선호하는 까닭(외제차를 심중에 두고 한 변호성 발언일 혐의가 짙다)을 여실히 알 수 있다는 주장도 일리가 없는 게 아니다. 하지만 양손으로 운전대를 꽉 쥐고 네비게이션도 못 알아먹는 골목길을 요리조리 돌고 돌아 퇴근 러시아워만 되었다 하면 해운대 방면으로 빠지려는 차들로 3, 4차선이 늘 정체인 광안대로를 2차선으로 달리다가 해운대 신시가지 방면으로 빠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할 벡스코 요금소를 앞두고 눈치껏 3차선으로 끼어드는 요령을 부리는, 그러고도 손으로 주파수를 맞춘 라디오 음악을 듣는 자신이 그리 주눅들 건 없다는 생각이 아직 더 큰 게 사실이다. 설령 값비싸고 좋은 차를 몰 요행이 일어난다 한들 『장자莊子』 속 노인 말마따나 그걸 모는 자신이 왠지 부끄러울 성싶어 사용하고 싶지 않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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