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감이 임박할 무렵 군인 한 명이 스윽 들어왔는데 눈치없이 까다롭게 굴었다. 윗머리를 3cm로 딱 맞춰 달라. 머리카락 질에 어울리는 두상이 따로 있는 법이거늘 깎으나 안 깎으나 별로 표가 안 나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자랑하는 머리카락이 두발이 단정하다는 칭찬을 들을 요량이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깎아 줘야 제격이건만 30cm 자를 동원하면서까지 군인 원하는 대로 깎아줬다. 군복 입은 남자가 멋을 부려 봐야 거기서 거기이지만 계급장을 보니 병장이었다. 부산을 위수 지역으로 하고 사단 본부는 해운대에 있는 지역방위사단 마크로 봐선 이 동네에 있는 예비군 훈련을 담당하는 예하 부대 소속 장병이지 싶었다.
- 휴가 다녀왔나 보지요?
- 외출입니다.
- 요새 외출 복귀는 몇 시까집니까?
- 오후 8시30분까지 들어가면 됩니다.
- 복귀하기 전에 머리 깎는 병장은 보기 드문데, 꽤 착실하네요.
- 요새 부쩍 간부들 두발 상태 점검이 빡세서요. 3개월 후면 제댄데 괜히 책 잡히기 싫어서 마지못해 깎는 겁니다.
- 윗머리를 3cm로 딱 맞추라는 이유가 그럼?
- 간부들이 윗머리 3cm 이내면 봐준대서 억지로 맞춘 겁니다.
제대할 때까지 야금야금 머리를 길러 민간인 세상으로 연착륙하고픈 말년 병장 염원 따윈 안중에도 없이 부대원 예외없이 전원 두발 점검이라니. 느낌적인 느낌 상, 새로 부임한 직속 상관이 FM을 들이대며 기선 제압하려는 옹졸한 술수인 게 뻔하지만 괜히 뻗대다 말년에 꼬이는 수가 있으니 조심하고 또 조심할밖에. 적당히 비위 맞춰 주다가 무탈하게 제대하는 게 상책이다 싶을 게다.
- 우리 시절엔 군 복무기간이 27개월이었지만 27개월이나 18개월이나 짬빱 먹을 때는 다 개고생이지 뭐. 우짜든동 몸 성히 제대하길 바랍니다.
- 27개월이나 하셨어요? 어휴, 저라면 지레 말라 죽었을 겁니다. 어떻게 견디셨어요?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때 비하면 요즘 군생활은 몸 풀다 끝나는 게임이나 마찬가지지. 그럼에도 2년이 채 안 되는 복무기간 동안 월급만 살뜰히 여투어도 목돈 만들어 제대할 수 있는 여건이니 세상 좋아졌다는 소리가 나오고도 남음이라.
27개월을 꽉 채우고 사회로 복귀하니 찐따가 된 기분이었다. 27개월로 세상이 상전벽해됐을 리 만무하나 강원도 두메 산골에 처박혀 더덕이나 캐 먹다가 세상 속으로 막상 내쳐지니 주눅부터 몹시 들어 속된 말로 몇 달 동안은 똥인지 된장인지 분간조차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로 기신기신했더랬다. 그런 개인적 경험에서 비롯된 편견이 분명하겠지만, 그리 넓지 않은 한반도 땅덩어리임에도 불구하고 군 복무지가 어디냐에 따라 제대 후 세상과 새삼 마주대하는 태도가 천양지차임을 확신하는 축이다. 고로 18개월 내내 부산 대도시 한복판에서 군생활을 즐긴 이라면 머리카락 길이에 예민할 수밖에 없는 건 지극히 당연하다.
다음날 마수걸이 손님은 경북 영천에서 은퇴 생활을 즐긴다는 늙수그레한 손님이었다. 경북 영천이라고 해서 3사관학교를 들먹거렸더니 잘 아는 눈치였다. 깎새가 3사관학교와 인연이 없지 않다. 학군단 후보생 시절 3, 4학년 하계병영훈련을 거푸 3사관학교에서 받느라 생고생하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진저리가 쳐진다. 한반도에서 지독시리 무덥다는 그 곳에서 여름 한 달 꼬박 군사훈련으로 보냈다면 말 다 한 거지. 염색 발라 놓고 시간도 죽일 겸 노닥거리다가 전날 석 달 뒤 제대라던 군인 얘기를 꺼냈더니 대뜸 이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