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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소회

by 김대일

​밥때를 따로 정해 놓은 게 아니니 남들은 느긋하게 즐길 점심나절에 손님이 들이닥쳐도 눈치없는 손님한테 몰래 매운 눈초리나 흘길 뿐이다. 점방문에 눈을 고정시키고 먹는 밥, 맛으로 먹어 본 적 별로 없다.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헷갈린다 싶으면 컵라면에 물을 붓고 정확하게 3분 뒤 젓가락질을 해댄다. 구독 중인 <소박사TV>는 날씨에 관한 유투브 동영상인데 통상 6분 내외짜리다. 그 동영상을 절반쯤 보고 있을 무렵 젓가락질을 멈추고 국물을 마시는 걸로 봐서는 면발도 3분 내외로 흡입을 끝내는 셈이다. 핸드폰 화면과 점방 문을 번갈아 쳐다보는 눈도 참 바쁘다. 무사히 한 끼 때우겠다는 의무감을 보상받으려는 몸부림이긴 한데 밥이 아닌 라면이라 드는 묘한 안도감만은 부인할 수 없다. 문득 라면을 가장 맛있게 먹었던 때가 언제인지 궁금해졌다.

일직 근무 설 때 새벽은 유난히 느릿느릿 기어갔다. 교대는 진작에 했건만 불침번 끝난 뒤 밀려드는 출출함을 못 이겨 좀체 잠자리에 다시 들지 못하는 소대원들이 끓인 뽀글이(봉지라면)를 한 봉지 얻어서 먹고 있노라면 변변한 건건이 하나 없이 그냥 꿀떡꿀떡 삼키는 면발과 국물로도 허한 심신을 위로받기에 충분했다.

유예기간이 얼마 남지 않은 청춘을 탕진한다는 불안감이 컸지만 완전히 리셋하지 않으면 떠나지 못할 서울이라는 쓸쓸하고 막막한 도시에서 그나마 위안거리라고는 회사 근처, 그러니까 1995년 강남역과 양재역 중간 즈음 뱅뱅사거리 근처 싸구려 회전초밥 가게에서 회사 동기들과 가지는 술자리였다. 젊은 객기에 '딱 한 잔'이 인사불성으로 이어지기 일쑤라 출근길은 늘 숙취로 고생길이었지만 빌딩숲 사이 분식집에서 먹던 해장라면 맛은 군생활 뽀글이만큼이나 기신기신하던 심신을 달래줬다.

그때 그 라면 맛과 비슷하다는 건 아마 그때처럼 현실이 고단해서이겠지만 그때 라면이 안겨줬던 안도감이랄지 위로감에 비해 함량 미달인 건 무슨 까닭일까.



라면

권기덕


내가 만약 라면이라면


​​운동할 땐 고릴라라면

춤추고 싶을 땐 캥거루라면

대화가 필요할 땐 앵무새라면

수영하고 싶을 땐 물개라면

협동할 땐 개미라면

여행하고 싶을 땐 제비라면

깜깜한 길 가야 할 땐 올빼미라면

친구 도와주고 싶을 땐 악어새라면


​​세상에서 가장 필요한 라면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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