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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툼한 질감으로 출렁거리는 말

by 김대일

대학 4학년 2학기 기말고사 때 컨닝하다 걸렸다. 시험 감독관은 학과 사무실 조교를 맡고 있던 하늘같은 학과 선배였다. 한참을 베끼는데 깍짓동만 한 사내가 유령처럼 스윽 다가오더니,

- 와, 꽈 수석 묵을라꼬?(왜, 과 수석 먹을라고?)

장난기 섞인 하이톤으로 뇌까렸다. 내일모레면 졸업할 녀석이 궁상맞기 짝이 없다는 책망을 에두른 덕에 그나마 덜 쪽팔렸다. 그 조교는 이후 교수 임용 복이 없는 대신 부산 사투리 권위자가 되었다. 부산 사투리에 관한 한 탁월한 전문가로.

오래되긴 했는데 부산 지역 일간지 무가지로 배달되는 부산시 기관지를 우연히 읽다가 그 선배가 쓴 칼럼을 발견한 적이 있었다. <'사투리'가 아니라 '부산말'입니다>란 제하로 부산의 문화재이자 정신적 보물, 무한한 콘텐츠로써 부산말(부산 사람의 삶이 녹아 있으며 부산의 역사가 담겨 있다고 강조한 필자의 신념을 반영해 '부산 사투리' 말고 '부산말'로 부르겠다 )을 지키고 가꿔야 한다고 역설하는 내용이었다. 과연 그다웠다. 필자는 부산말만이 가지는 특징으로 크게 두 가지를 들었다. 우선 높낮이다.

높낮이는 단어를 길이로 변화했지만, 부산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높낮이는 단어를 길이로 늘어지게 발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모아서 높거나 낮게 발음해야 해서 길이가 긴 모음 즉, 이중모음은 자음 뒤에서 발음되지 않는다. 그래서 '명물'을 '맹물'로, '경제'를 '갱제'로 발음하기도 한다. 부산사람이 이중모음 발음을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부산말은 높낮이로 충분히 구분할 수 있어서 발음이 어려운 이중모음을 발음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 이름 '영수'는 '앵수'로 발음하지 않는다. 첫소리에 자음이 없어서 이중모음이라도 하나의 음절로 높낮이를 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근열 부산대 국어교육과 강의교수, <다이내믹 부산>, 2021_16호)​

둘째로, 축약과 생략이다.

뱃일하는 부산에서는 말을 길게 하면 배 위에서 서로 잘 전달되지 않기에 축약과 생략이 발달했다. '선생님'을 한 음절로 줄여 발음하기 위해서 첫째 음절은 앞 자음 'ㅅ'과 둘째 음절은 중간 모음 'ㅐ', 마지막 음절은 끝 자음 'ㅁ'을 모아 '샘'으로 집적해 나타난 것이다. 또 다른 예로 동사 형용사 관계없이 '안'을 앞에 두는 것으로 사용하기 쉬운 문법을 선택한다. '먹지 않았다'를 '안 뭈다'로 '예쁘지 않다'를 '안 이쁘다'로 사용한다. '머 뭈나?'와 '머 뭈노?'와 같이 -나, -노'를 사용해 먹었느냐 아니냐는 판정 의문과 무엇을 먹었는지 물어보는 설명 의문을 구분하는 것도 효율성에 근거한 것이다.(같은 칼럼)​

사투리라 하면 서울 이외 지역에서 통용되는 촌스러운 말로 인식하는 경향이 짙다. 헌데 서울말도 따지고 들면 서울에서 통용되는 일개 지역 말일 뿐이다. 문제는 국가가 언어 정책을 독점한다는 데 있다. 즉, 국가가 성문화된 철자법(맞춤법)을 제정하고, 표준어를 선정하고(=비표준어를 지정하고), 사전 편찬마저 독점적으로 차지한 상황은 세계적으로 매우 이례적이고 괴이하다고들 한다. 국가가 말의 규범(어문규범)을 독점하고 어떤 말이 맞고 틀렸는지 채점해주는 체계 속에서 언어민주주의는 요원하다(김진해 경희대 교수,<말글살이- 맞춤법·표준어 제정, 국가 독점?…오늘도 ‘손사래’, 2022.12.11). 어문규범을 ‘성문화된 규정’으로 정한 나라는 전세계에서 한국과 북한, 중국 정도에 불과하고 특히 표준어의 세부적인 기준과 사례까지 규정으로 제시하는 곳은 한국뿐이라는 사실은 놀라우면서 엽기적이기까지 하다. 국가가 말을 통제하다니!

부산말 권위자인 선배는 표준어란 여러 지역에 사용하는 말에서 두루두루 뽑아서 만든 것일 뿐 서울말이 표준어의 정형은 아니라고 규정했다. 전라도 말 '아따'가 빈정거릴 때 쓰는 표준어가 됐고, 경상도 말 '삐대다'가 '한 군데 오래 눌어붙어서 끈덕지게 굴다'는 뜻인 표준어라고 밝힐 때는 이 얼마나 쌈박한 평등주의인가!

어쭙잖은 서울말 쓰면서 뻐기던 때가 한때 있었더랬다. 중앙지향적 인간으로 처신하려면 그리 해야 하는 줄 알았다 어리석게도. 하지만 표준어로는 도저히 감당이 안 되는 말의 여운이 사투리에 무궁무진하게 잠재해 있음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달은 뒤로는 사람의 삶과 역사가 집적된 사투리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누군가 사투리를 '비로소 말은 평평한 표준어에서 빠져나와 두툼한 질감을 갖고 출렁거린다'라고 표현했다. 지당하신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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