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가 나르키소스가 진실을 알게 되었음을 묘사한다. "그는 바로 나야. 이제야 알겠어. 내 모습이 나를 속이지는 못하지. 나는 나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고 있는 거야. 내가 불을 지르고는 괴로워하고 있는 거야. 아, 어떻게 해야 하지?"
나르키소스는 사태의 진실을 알고 나서도 자기애의 덫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오비디우스는 외친다. "돌아서보라! 그러면 그대가 사랑하는 것도 없어지리라." 수면에서 얼굴을 돌리기만 해도 그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건만, 나르키소스는 그렇게 하지 않았거나 못했던 것이다. 오히려 수면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더욱 집착하며 눈물을 흘렸다. 눈물이 물 위에 파문을 일으켜 모습이 흐려지자 "어디로 도망치는 거야!"라며 소리쳤다. 그리하여 "마치 밀랍이 불에 녹아내리듯, 아침 서리가 햇살에 녹아내리듯" 그의 육신은 괴이한 사랑의 불길에 녹아내렸고, 에코가 그랬듯이 생명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가 그의 원래 모습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그는 저승의 거처에 받아들여진 뒤에도, 스틱스 강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르키소스 신화가 전하는 메시지의 끔찍함은 여기에 있다.
(…)
임상심리학자 크레이그 맬킨은 나르시시즘의 스펙트럼에서 '자신이 특별하다는 생각과 태도'의 정도에 따라 '건강한 나르시시즘'과 '위험한 나르시시즘'을 구분한다. 그러나 오비디우스의 이야기에서 보았듯이 극단적 성향이 문제를 일으키며, 우리 주변에 그런 성향에 지배받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 현실적 문제다. 오스카 와일드가 각색했다는 나르키소스 신화의 '속편'은 이에 대해 다시금 숙고하게 한다.
나르키소스가 죽었을 때 요정들이 찾아와 그의 아름다움을 가장 가까이서 볼 수 있었던 호수를 위로했다. 그의 죽음이 얼마나 슬프겠냐고. 그러자 호수는 이렇게 되물었다. "나르키소스가 그렇게 아름다웠나요?" 이 의외의 말에 요정들은 당혹스러웠다. "그대만큼 잘 아는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르키소스는 날마다 그대의 수면 위로 몸을 구부리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보았잖아요!" 호수는 잠시 침묵하더니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나는 지금 나르키소스를 애도하고 있지만, 그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건 전혀 몰랐어요. 나는 그가 내 위로 얼굴을 비춰볼 때마다 그의 눈동자에 비친 나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그가 죽었으니 아, 이젠 그럴 수가 없잖아요!"
호수는 자기애를 향유할 기회를 상실하게 된 자신을 슬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는 타자의 죽음을 자기애의 쾌락을 상실했다는 차원으로 흡수해버리는 잔인함마저 있다. 호수와 나르키소스의 눈에는 '자기만' 존재했던 것이다. 타자는 나를 비춰주는 도구와 수단으로서만 그 존재 이유가 있었다.
(…)
나르키소스의 신화는 비과학적 알레고리이지만 적어도 핵심적인 것을 전달하고 있다. 첫째는 나르시시스트에게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 점에서도 나르시시즘은 이기주의와 다르다. 후자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자기 자신의 이익만을 꾀하는 행위다. 이는 윤리적인 문제다. 전자는 다른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으니 함부로 무시하고 자기 존재만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는 존재론적 문제다. 둘째, 나르시시스트에게 다른 사람들은 항상 '수단일 뿐'이다. 나르시시즘의 스펙트럼이 어떻게 변하든, 적어도 이 두가지 속성은 그 개념을 이해하는 기본 축일 것이다.(<김용석의 언어탐방-나르시시즘: 건강한 자긍심 또는 병리학적 자애>, 한겨레, 2022.06.29. 에서)
이 칼럼이 나오기 얼마 전, 뮤지컬 업계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었다. 티켓파워를 자랑하는 뮤지컬 여배우가 캐스팅에 공공연하게 개입했다고 동료 배우가 저격하자 "주둥이와 손가락을 놀린 자는 혼나야 한다"며 고소를 했기 때문이다. 뮤지컬 전업배우 1세대들이 호소하자 고소를 취하하는 것으로 일단락되는 듯싶었지만 이후 알려지지 않았던 여배우의 전력이 속속 드러나면서 파장이 더 커지는 형국이었다.
뮤지컬 업계를 발칵 뒤집을 정도로 영향력이 큰 여배우의 능력치란 게 과연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전혀 안 되었지만 아니 땐 굴뚝에 연기가 날 리 없으니 "내가 제일 잘 나가"가 화근이었지 않나 싶다. 여성학자 정희진도 자기도취의 특징이 안하무인이라고 했다.
주변에 타인이 없다는 착오에서 자기만 생각하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덜하다. 나르시시즘은 자기방어에서 시작되었다. 취약한 자아가 오만이라는 방식으로 수치심을 잊는 것이다. 타인의 존재를 망각하고 홀로 궁궐에 산다. 주지하다시피 ‘공주병’ ‘왕자병’이 초기 증세다.(<정희진의 낯선 사이>, 경향신문, 2013.06.06.)
나르시시스트를 공주나 왕자처럼 대하면 우쭐하는 김에 그런 상대를 살짝 생각해주는 척이라도 하지만 비위 상하고 아니꼬운 건 감수해야 한다.
승객이 적은 지하철 차량 안에서 10여 분간(긴 시간이었다) 큰소리로 통화하는 사람이 있었다. 모두 고역인 채 얼굴만 쳐다볼 뿐 방관했다. 한 승객이 “조용히 말하라”고 했다. 그의 반응은? 더 큰 목소리로 “니가 다른 자리로 가!”라고 했다. 홀로 용기를 냈던 그는 다음 역에서 내렸다. 나는 죄책감을 느꼈다.
뻔뻔함은 자기 보호를 위한 위악僞惡이 아니다. 진정성 넘치는 자기확신이다. 또한 이들은 약간의 조증躁症 상태로 자신감 넘치는 즐거운 생활을 한다. 상대가 강자와 약자냐에 따라 얼굴 표정이 급변하는 ‘재능’도 있다. 이들은 정신병자가 아니다. 건강하다. 정신병은 뻔뻔한 사람에게 피해 입은 착한 이들이 걸린다. 자신의 지나친 자신감을 불편해하는 이들을 무능하다고 비웃으며 성공에 강한 집념을 보인다. 사과나 양보를 굴복으로 생각한다. 양심과 윤리, 부끄러움은 자신의 질주를 방해하는 도로의 불필요한 표지 같은 것이다.(같은 글)
자기확신이 강함을 넘어 집착 수준인 이한테는 절대 못 이긴다. 그 뻔뻔한 아집은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타자의 경종을 불허한다. 그런 치에 대응하는 방법은? 결코 쉽지 않지만 무관심으로 일관할 뿐이다. 그조차도 힘겹다면 하는 수 없다. 정신병 걸리기 전에 거길 뜨는 수밖에. 당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