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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일요일(174)

by 김대일

1년

오은


1월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총체적 난국은 어제까지였습니다

지난달의 주정은 모두 기화되었습니다


​2월엔

여태 출발하지 못한 이유를

추위 탓으로 돌립니다

어느 날엔 문득 초콜릿이 먹고 싶었습니다


​3월엔

괜히 가방이 사고 싶습니다

내 이름이 적힌 물건을 늘리고 싶습니다

벚꽃이 되어 내 이름을 날리고 싶습니다

어느 날엔 문득 사탕이 사고 싶었습니다


​4월은 생각보다 잔인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단 하나,

한참 전에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5월엔 정체성의 혼란이 찾아옵니다

근로자도 아니고

어린이도 아니고

어버이도 아니고

스승도 아닌데다

성년을 맞이하지도 않은 나는,

과연 누구입니까

나는 나의 어떤 면을 축하해줄 수 있습니까


​6월은 원래부터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내가 꿈꾸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7월엔 뜨거운 물에 몸을 담가봅니다

그간 못 쓴 사족이

찬물에 융해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때는 빠지지 않았습니다


​8월은 무던히도 무덥습니다

온갖 몹쓸 감정들이

땀으로 액화되었습니다

놀랍게도, 살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9월엔 마음을 다잡아보려 하지만,

다 잡아도 마음만은 못 잡겠더군요


​10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책은 읽지 않고 있습니다


​11월이 되었습니다

여전히, 사랑은 하지 않고 있습니다

밤이 되면 꾸역꾸역 치밀어오릅니다

어제의 밥이, 그제의 욕심이, 그끄제의 생각이라는 것이


​12월엔 한숨만 푹푹 내쉽니다

올해도 작년처럼 추위가 매섭습니다

체력이 떨어졌습니다 몰라보게

주량이 줄어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잔고가 바닥났습니다

지난 1월의 결심이 까마득합니다

다가올 새 1월은 아마 더 까말 겁니다


​다시 1월,

올해는 뭐든지 잘될 것만 같습니다

1년만큼 더 늙은 내가

또 한번 거창한 계획을 세우고 있습니다

2월에 있을 다섯 번의 일요일을 생각하면

각하(脚下)는 행복합니다


나는 감히 작년을 승화시켰습니다


(이틀 모자라는 1년 전, 「나는 오늘」이라는 오은 시인의 시를 다뤘었다. 그리고 오늘 또 오은 시인이고 시 제목은 공교롭게도 「1년」이다.

나는 오늘오늘을 무엇으로 살면서 작년 1년을 승화시켰는지 생각에 잠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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