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은 강력계 형사로 40년을 근무하다 은퇴했다고 자신을 밝혔다. 굵직굵직한 사건을 해결한 전후사정을 설명하러 툭하면 TV에도 나왔었다고 뻐기는 그의 이목구비가 번듯하고 허우대도 훤칠해 믿을 만한 과시로 여겨지긴 했다. 어디서 거나하게 낮술을 빨았는지 주기가 도는 얼굴이 더 뺀질거렸는데 머리 깎는 내내 남부럽지 않은 은퇴 생활까지 뻐기는 통에 거만해 보이기까지 했다.
매달 25일이면 꼬박꼬박 통장에 찍히는 공무원연금을 노부부가 사이좋게 절반씩 나눠 가지되 그 돈으로 무엇에 얼마를 쓰건 배우자가 일절 간섭하지 않기로 단단히 약조를 했다고 한다. 대신 집으로 날아오는 공과금은 자기가 다 내야 해서 동네 노인회 총무를 맡아 무리를 이끌고 허구헌 날 유흥을 즐기자면 썩 넉넉한 편이 아니라고 게정을 부렸다. 40년 인생을 다 바쳐 받는 연금액이 군인, 선생 연금보다 적어서야 어디 공무원짓 해먹겠냐면서 이 나라 공무원을 홀대하는 연금 정책 질타는 덤이고.
전직 형사, 그것도 강력계 형사임을 밝힌 마당에 노인은 기선 제압용인지 허세 작렬용인지 대화 사이사이에 껄끄러운 욕설을 욱여넣었는데 깎새가 대화 상대로 만만해서겠거니 개의치 않았으나 그 품격에는 치명적인 하자로 작용했다. 졸개 역할을 충실히 한 깎새가 대견했는지 노인은 자기가 이끄는 노인회 무리를 모다 끌고 오겠다며 호언장담을 해댔다.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올시다"라며 허리를 굽혀 고마움을 곡진히 표했으나 와야 오는 거이니 두고 볼 일이다. 왕초라고 떠벌리는 작자치고 왕초 구실하는 이를 본 적이 별로 없어서.
좌우지간 노인은 은퇴생활을 무척 만족해하는 건 사실이었다. 거리낌없이 자랑질을 해대는 품이 아니꼬웠지만 그럴 만해서 그러는 거라 그 태연한 당당함이 솔직히 부러웠다. 매달 25일 3백만 원에 가까운 돈이 통장에 따박따박 꽂히는 기분이 어떨지 준비가 별로 안 된 깎새는 영 감이 없다. 그러니 연금 받는 노후에 무얼 하면서 지낼지도 상상을 하지 못한다. 허구헌 날 친구들과 어울려 술도가로만 싸돌아다니면서 문뱃내 풀풀 풍기는 일상이 그리 나쁘지는 않겠으나 술도 마음이 편해야 술술 들어가고 맛이 나는 법인지라 전직 강력계 형사마냥 돈 나올 구석이 없으면 민폐도 그런 민폐가 없을 것이다. 부러우면 지는 거라지만 노인이 좀 많이 부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