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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치 행복, 최소치 행복

by 김대일

두 글자의 철학은 계속 이어진다. 오늘은 행복幸福이다. 철학자 김용석은 행복幸福이란 말은 그 어원에서 최대치와 최소치로 구성되어 있다고 봤다. 행복에서 복福이라는 한자는 신에게 제祭를 올리는 사람의 모습과 제물祭物을 높이 쌓아올린 탁자를 형상화한 것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행복은 인간이 기원해서 받을 수 있는 초자연적인 혜택이다. 이는 행복에 있어서 최대치다. 기원할 수는 있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 더 관심이 있는 행幸 자는, '젊어서 죽을' 요夭에 '거스를' 역逆이 합쳐서 변형된 것이다. 이것을 풀이하면 젊어서 일찍 죽는 일을 면하면 행복하다는 뜻이 된다. 행복의 의미를 파악하는 데 이 점은 매우 흥미롭다. 우선 불행한 상태가 아닌 것을 통해서 행복을 느끼고 얻을 수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또한 요절夭折하는 경우가 그리 흔한 것은 아닐진대, 그런 불행을 맞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는 뜻일 수 있다. 이는 행복에 있어서 최소치다. 그러므로 최소치로서 행복은 우리가 일상에서 그냥 지나치는 것에도 있고, 또한 매우 상대적이라는 뜻이다. 철학자는 이에 한 가지를 덧붙이는데 행복은 순간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일상생활의 경험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고 했다. (김용석, 『두 글자의 철학』, 푸른숲, 2005, 187~188쪽)


맥주를 마시다 잠깐 밖으로 나갔다. 곤히 자던 중에 불쑥 나섰던 걸까, 잠옷 같은 털옷을 펄렁이며 다운증후군 여자아이가 천연덕스럽게 앞을 스쳐 지나간다. 노래를 따라 흥얼거리는 건지 누군가와 화상 통화를 하는 건지 스마트폰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는 도리도리하듯 고개를 흔들어댄다. 나이를 잊어버린 표정이 천진난만해 아찔했다.

바통을 이어받는 릴레이 경주라도 하듯 여자아이 사라진 곳으로부터 머리칼 희끗희끗한 노신사가 이어 다가왔다. 그도 역시 스마트폰에 정신이 온통 팔려 있다. 하지만 서두르는 발걸음에 비해 횡보만 거듭했다. 목적지를 명확하게 겨냥하지 못했는지 조바심 가득한 표정은 그의 빛바랜 양복처럼 절망적이다. 야멸찬 도시의 밤거리와 잘 어울리지 않는 그는 대리운전 기사임에 틀림없다.

다시 맥주 가게로 들어가 김 빠져 시금털털한 맥주를 마저 마셨다. 일행은 그 뿐이다. 계기랄 것도 없이 그와는 가끔 만난다. 그는 의례껏 저녁 시간을 통으로 비우지만 술을 썩 즐기지 않는 그를 배려해 절주한다. 길면 두 시간 남짓인 만남에서 오고가는 대화는 진부하다. 제 딴에는 회심의 재담을 주워섬기며 듣는 자의 의표를 찌르려 하지만 기실 뻔한 화제를 재탕 삼탕 우려먹기 일쑤다. 십수 년 간 이어져 온 인연이라손 감정의 급반전을 꾀할 만큼 대수롭지가 않다. 세월의 관록만 믿어 오지랖을 일삼다간 상대방의 무덤덤한 반응에 뜨악할 공산이 크다. 그러니 늘 이런 식이다. 견실한 소셜 네트워크 구축의 일환으로는 애초부터 함량 미달인 만남인 것이다.

그런 그가 그날만은 느닷없었다. 암묵적으로 합의한 불간섭 원칙을 무시해서라도 상대를 도발하려는 저의는 무엇일까. 그가 그토록 고수하는 보편적 일상, 즉 정규직 박탈이라는 암초가 늘 상존하는 잘난 직장에서 법정 근로시간의 유해성을 홍보라도 하듯 낮밤을 가리지 않는 성실성을 만방에 드러내면서 "이 회사에 다니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말 행복해요" 라는 어용의 기치를 올리는 게, 이미 고인이 된 노모의 병원비를 빚으로 충당한 후유증과 대학 진학을 앞둔 아들내미 대학 등록금을 회사의 복리후생비로 충당할 때까지는 몸이 으스러져라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비장한 속내라는 걸 새삼스레 반복할 까닭이 없는데도 말이다.

"식구들 눈총을 면피하는 방법은 내가 이토록 애면글면하고 있단 걸 드러내는 수밖에 없어. 몇 푼 안 되는 수입에 기대어 흥뚱항뚱 세월만 축내는 너를 보면 그걸 여유라고 하기엔 딱히 미심쩍어 걱정이다. 사람마다 사는 방식이 다 다르다마는 나로서는 이해가 전혀 안 가서."

"재운이 없을 뿐더러 이재도 어두우니 애시당초 단념했시다. 없이 살아도 마음 가는 대로 살라요. 살아온 지난 반백년을 지금 형처럼 세파에 끌려다녔을망정 남은 생은 내 식대로 살라요."

"너는 편하게 지껄인다만 네가 그리 산다고 제수씨가 잘도 좋아라 하겠다. 애새끼들 밑으로 들어가는 건 어떻게 감당할 거며 살림살이라고 옳게 버틸까."

그가 계산하는 술값까지만 그 호의에 고마워할 뿐이다. 마주앉아서 시시덕거리는 두 시간의 가치를 술값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게 여기려는 건 보편성이란 허울을 뒤집어쓴 그의 나약함을 자꾸 목격하게 돼 불편해서다. 평행선을 달릴 게 뻔한 이견을 재생산하느라 시간을 허비하는 건 재앙이다. 불화는 없지만 친화도 어려운 관계는 김빠져 시금털털한 맥주를 닮았다. 그를 존중하지만 조금 전 삽시간에 나타났다 사라진 그들에게 이미 마음 뺏겼더랬다.

부러진 날개였을지 모른다 잠옷 같은 털옷이. 그럼 그녀가 흥얼거린 건 혹시 천상의 노래였을까. 그녀에게 세상의 질곡이란 게 무슨 의미가 있으랴.

초점 잃은 눈동자를 가진 노신사가 주역이 되기에는 밤거리 풍경은 너무 거대하다. 프레임의 가장자리나마 부여잡으려는 모델의 억척스런 안간힘은 그래서 더욱 가련하다. 사는 건 그처럼 끔찍하게 고단하지만 불안과 절망을 단칼에 베어 버리기엔 정신의 칼날은 무디기만 하다. 노신사는 어쩌면 우리 모두의 무기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리기사가 어김없이 밤을 기다리듯 생동하는 내일을 계속 재촉하련다. 허무할 줄 뻔히 알면서도 오늘과 다른 내일을 매번 꿈꾸는 천진난만. 살아 보니 그런 것도 같다. 어제오늘이 죽고 싶은 고통이어도 죽지 않을 내일이 있다면 행복한 인생임을.

불현듯 천사들이 변장해 그들로 나타났을지 모른다는 망상에 사로잡힌다. 그렇다면 진정 구원받은 것인가 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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