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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읽는 일요일(175)

by 김대일

아지매는 할매되고

허홍구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

그래서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아줌마 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시 내력을 쓴 기사다. 읽어 보면 알겠지만, 대구도 그런 곳이었다. 제발 과거형으로 묻히지 않길 바랄 뿐이다.


시인이 살아오면서 이런 저런 인연과 기회로 만난 사람들을 한 사람씩 실명으로 불러내 인물 스케치하여 묶어낸 시집에 실린 시다. 하지만 ‘염매시장 아지매’란 부제가 붙은 이 ‘아지매’만큼은 구태여 실명을 들추어낼 이유도 없고 필요치도 않았을 것이다. 염매시장은 대구 반월당 주변에 위치한 도심 속 재래시장이다. 시에서의 배경인 ‘염매시장 단골술집’이 어디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내게도 염매시장 하면 생각나는 술집이 하나 있다. 가끔 서울서 내려오면 친구들과 어울렸던 곳인데 70년대 말 유신시절부터 지금까지 밥도 팔고 술도 팔면서 대구 민주화 운동의 역사와 함께한 ‘곡주사’란 식당이다.

젊은 지성들이 시대의 울분을 토하고 저항으로 몸부림쳤던 장소였다. 그래서 ‘곡주사(哭呪士)’는 ‘통곡(哭)을 하며 유신을 저주(呪)하던 선비(士)’들이 모여 밤새워 막걸리를 마셔대던 곳이었다. 덕산 빌딩 뒤 ‘행복식당’과 더불어 옛 명성을 이어가며 지금껏 숨결을 간직해온 대폿집이다. 행복식당이 야당인사나 교수, 기자, 시인을 비롯한 문화예술인들이 즐겨 찾던 곳이라면, 곡주사는 운동권 대학생들의 공간이었다. 젊은 혈기는 아니지만 요즘도 그 곡주사에서 다시 ‘곡주’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이곳은 처음 ‘성주식당’이란 상호로 개업하여 훗날 ‘할매식당’이란 이름도 썼다. 지금도 할매가 지키고 있지만 예전의 그 할매는 아니다.

장소와 사람은 다를지라도 시인의 탁월한 해학이 그 ‘할매’들을 단박에 호명케 한다. 일상의 언어로 생생하게 표현한 ‘사건’과 ‘추억’과 ‘풍경’이 구수하게 어우러져 정겹기 그지없다. 고은 시인의 ‘만인보’도 있으나 허홍구 시인의 ‘인물시’에는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취하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관찰 기록과 특유의 유머가 담겨있다. 사람냄새와 리얼리티가 그의 인물시의 가장 큰 매력이다. 킥킥거리며 시를 읽다보면 시에 등장하는 ‘염매시장 아지매’의 넉넉한 품성과 척척 받아넘기는 재치, 그리고 시인의 여유와 질펀한 익살에 스르르 빠져들고 만다. 하기는 그렇게 장단이 맞지 않으면 빚어질 수 없는 시다. 허홍구 시인의 ‘여자 사람 친구’인 권천학 시인이 쓴 ‘허홍구를 말한다’란 시에는 ‘비가 쏟아지는 날 천둥번개가 치면 지은 죄업 때문에 문 밖 출입을 삼가 한다는 남자’라 했고 ‘저놈 잡아라하고 찾아올 여자들 때문에 TV에는 절대로 출연을 못한다며 너스레를 떠는 남자’라고 그를 말했다. 허홍구 시인은 누구에게나 그런 ‘남자 사람 친구’이다.

* 출처 : 대구일보, 2016.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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