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잘 하는 사람은 지천으로 널렸지만 말 잘 듣는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잘 듣는 사람이 드물거니와 상대방 말주변을 맞춰 가며 대화를 무난하게 이어가는 사람은 더더욱 찾기가 어렵다. 눈치 없는 말주변을 타고났거나 제 딴에는 고도로 훈련되었다고 자부하는 수작질로 불통 대화를 의도하다가 악감정의 비수를 상대방에게 겨누는 살벌한 장면을 심심찮게 목격하는 까닭은 이 때문이다. 그러니 차라리 말을 마는 게 더 현명할지 모른다.
한 15년 전인가, 파트너십으로 만난 동갑내기 여성이 팀장으로 있던 보험 조직에 몸 담았었다. 그녀는 두뇌 명석하고 성격 쾌활하며 팀원들을 따뜻하게 대하면서도 아우를 땐 당찬 리더십이 몸에 밴, 여러 팀 중에서도 군계일학같은 팀장이었다. 그런 그녀를 더욱 도드라지게 만드는 재능은 그녀만의 독특하고 센스 넘치는 화술이었고 평생 잊혀지지 않게 뇌리에 콱 박혀 버렸다.
대화를 할 적에 그녀는 들을 수 있을 때까지 충분히 듣는다. 상대방이 제 속엣말을 모두 소진시킬 때까지 진득하게 듣고 또 듣는다. 아주 진중하게 경청하면서 상대를 최대한 배려하는 리액션도 아끼지 않는다. 이를테면 상대방이 공치사를 늘어놓으며 들썩쿵들썩쿵 떠들면 백점 받은 시험지를 자랑하는 자식을 대견하게 바라보는 엄마같은 표정을 지어 보인다거나, 속상한 나머지 열변을 토하면 마치 제 일인 양 쌍심지를 세우는 식이다. 각고의 자기 수련에서 얻어진 의도적인 연출력일지 모른다는 의심을 안 해 본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도 상대방을 배려하는 진지함만은 부인할 수 없어서 그 덕에 대화는 정서적으로 완벽한 일체화를 이루며 흐뭇하게 마무리되곤 했다. 그런 고로 그녀와 대화를 나눈다는 행위 자체가 무척 즐거운 이벤트라고 여겨 바라는 이들이 줄을 섰음은 당연지사였다.
그럼에도 그녀 역시 감정에 휘둘리는 인간인지라 터무니없이 입술을 놀린다거나 당치않게 헤살을 부리는 상대방과 마주하면 당연히 짜증이 날 법도 한데 그럴수록 그녀의 화술은 더욱 돋보였다. 한 팀원이 어떤 계획을 추진하다 타당성이 별로 없다는 게 드러났는데도 강행하려고 떼를 썼다. 강행해야 하는 이유를 논리적으로 대지도 못하면서 어린아이처럼 철없이 엄부럭을 떨더니 급기야 자기 충정을 몰라 준다면서 팀장과 팀원들을 싸잡아 원망하는 언사를 늘어놓기에 이르렀다. 인내심의 극한을 달리던 그녀, 네 말을 충분히 알아들었으니 이제 그만 지껄이라는 듯이, 하지만 오죽 속상하면 그러겠냐는 듯이, 내가 네 속을 왜 모르겠냐는 듯 입언저리에 보일락 말락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채 야무지게 한 마디 툭 던진다.
“그 입 다물라!”
아, 그토록 극적인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의 부조화란! 희한하게도 그 장면에서 염화미소拈華微笑란 성어가 떠오른 건 무슨 조화일까.
발화 시점의 상황을 분석해보자. 그녀는 쏘아붙였고 그것과는 이율배반적인 얼굴 표정,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흠칫 놀랐지만 그녀의 의도를 재빠르게 간파해 수굿해진 상대방, 그리고 대화자들을 둘러싼 공기의 감성적 밀도 따위를 종합적으로 분석해 보건대, 그토록 살벌한 명령조로 그토록 명랑하게 제압하는 걸 이전에 본 적 없고 이후에도 없을 거라 확신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