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온 지 20년을 훌쩍 넘긴 에바 헬러 소설 『복수한 다음에 인생을 즐기자』(김인순 옮김, 열린책들, 2000)는 애인한테 배신을 당한 여인의 통쾌한 복수 과정을 유머러스하게 보여준다. 프랑스 아비뇽으로 휴가를 떠난 옛 애인 뒤를 밟던 중 뒤가 급한 나머지 프랑스 화장실로 들어간 주인공이 느닷없이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생식기 발달이론 중 항문기를 늘어놓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나는 어떤 심리학 박사 학위 논문에서, 지그문트 프로이트가 프랑스 사람이었다면 항문 집착 이론을 생각해 내지 못했을 것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항문 집착은 자신의 배설물에 집착하는 것을 의미하며, 비유적으로는 자신의 어떤 것도 내놓으려 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항문 집착의 단계를 거친다. 어린아이가 대소변 가리는 것을 배울 때, 대변을 보면 칭찬받기 마련이다. 그러면 어린이들은 그것을 못내 자랑스러워하며 전혀 대변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이 항문 단계가 너무 오래 계속되는 경우, 아이는 항문적인 성격을 갖게 된다. 그것은 혼자서 모든 것을 다 가지려는 인간, 곧 구두쇠를 가리킨다. 그러나 보지 않고도 대소변을 구멍에 떨어뜨릴 수 있는 대신 자신이 내놓은 배설물을 감탄하면서 바라볼 수 있는 전형적인 오스트리아와 독일의 화장실도 항문 집착에 한몫을 했다. 이것이 바로 박사 학위 논문의 요지였다. 프로이트 학파 사람들은 이 이론을 놓고 여러모로 토론을 벌였다. 그러나 그들은 몸의 균형을 잡으면서 바닥에 뚫린 구멍에 볼일을 보는 민족들에 대해 정확하게 아는 바가 없다고 시인했다.(위의 책, 201~211쪽)
소설가가 설파한 '항문 집착 이론'이라는 게 과연 합당한지 궁금해 인터넷을 뒤져봤다. 그러다 한국의 한 철학 교수가 쓴 글을 읽고 허구가 아님을 확인했다.
프로이트는 성 충동의 발달과정을 구순기-항문기-남근기-성기기로 설명했는데 특히 항문기 성애와 성격이 돈에 대한 태도와 연관이 많다. 항문기란 대략 2~3세에 진행되며 배변활동에 대한 통제를 처음 경험하는 시기로 본능에 대한 타인(부모)의 훈육을 접하면서 대인관계와 사회적 규칙에 대한 태도가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다. 이 시기 아이는 똥을 매개로 타인의 통제와 사회적 규칙에 순응하느냐 반항하느냐의 선택에 직면하면서 타인을 대하는 태도를 형성한다. 만약 부모가 원하는 방식으로 주어진 규칙에 따라 배변을 해주다보면 아이는 똥을 부모에 대한 선물과 사랑의 의미로 생각하게 되며 타인에 대해 너그러워진다. 그러나 아이가 부모가 부과하는 규칙에 반항한다면 소변을 가리지 못하거나 대변으로 몸을 더럽히면서 사회적 통제를 거부하고 타인에 대해 공격적으로 되기 쉽다. 이런 아이는 성장하면서 반항적으로 변하고 극도의 자기중심적 성격을 가지기 쉽다.
똥이란 아이의 몸에서 밖으로 배출되면서 분리되는 몸의 기관이자 방출을 통해 긴장을 해소해주는 매개물로 성장기 아이에게 아주 중요한 대상이다. 또 자신이 변을 억제하고 조절하면서 아이는 쾌감을 맛보기도 하고 타인에 대한 관용(선물)과 거부의 태도를 표현할 수도 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아이가 낯선 사람 앞에서는 변을 잘 보려고 하지 않는 것이 그런 이유다. 이런 연유로 무의식의 관점에서 보면 ‘똥’은 남근, 돈, 선물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런 대상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주체가 베풀거나 파괴할 수 있는 것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므로 항문기는 특히 가학성이나 피학성의 태도가 형성되는 계기가 된다. 항문기는 대상을 타인(어머니)을 통해 입으로 취득하며 수동적으로 쾌락을 경험하는 구순기와 달리 대상(똥)을 매개로 타인에 대한 허용과 거부를 취하는 능동적 시기에 해당한다.
그런 까닭에 항문기 성격은 ‘깔끔함’, ‘인색함’, ‘완고함’으로 정의된다. 깔끔함은 질서와 연관되고, 인색함은 돈이나 선물, 그리고 완고함은 사회적 규칙과 관계가 있다. 항문기에 똥은 대상으로서 아주 특별한 역할을 하는데 무의식의 관점에서 그것은 돈과 가장 연관성이 많다. 단순히 대변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을 타인이 원하는 사회적 방식으로 처리하면서 너그러움을 베푸는 것이 항문기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대변이란 최초로 아이가 부모에게 주는 선물이자 쾌락의 대상이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 대상에 매우 집착한다. 유치원 또래의 아이들이 유독 똥이나 방귀에 집착하고 방귀대장 뿡뿡이 같은 캐릭터를 재미있어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리고 성장하면서 대변은 돈에 등치되어 무의식적으로 작동하면서 타인과 돈과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에서 심리적으로 큰 영향을 미친다.(김석 건국대 교수, <왜 우리는 그렇게 돈에 집착할까?>, 르몽드디플로마티크, 2019.05.24 에서)
덧붙여서 교수는 배금주의 풍조가 만연해지면서 사람의 목숨조차 함부로 대하는 사회 여러 풍조는 항문기 사회의 전형을 잘 보여준다고도 했다. 언제부터인가 돈을 잘 쓰는 것보다는 많이 버는 것 자체가 절대적 목표가 되었고, 자신의 내적 쾌락에 집착해 배변을 거부하는 항문기 아이처럼 돈의 축적에만 몰두하는 순간 그것은 인간관계를 파탄시키고 이기주의를 낳는 악의 원천이 된다고도 했다. 돈이 악마의 배설물인 것은 돈이 나와 타인의 관계를 탈인격적 관계로 만들면서 배금주의 가치에 희생시키는 대표적 수단이기 때문이라는 대목에서는 얼마 안 되는 카카오뱅크 잔고를 털어 기부를 해야 할지 고민하기에 이르렀다.
새벽 출근 전 집에서 한 번, 점방 와서 또 한 번 똥을 싼다. 오늘도 역시 똥을 쌌지만 점방 화식 화장실에 쭈그려 앉아 밀어낸 똥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과연 나는 똥덩어리인지 아닌지' 실존적 위기에 봉착하고야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