샴푸 이야기(2)

by 김대일

2022년 9월께니까 추석 대목 즈음이었다. 초면인 손님이 염색은 해야겠는데 머리가 가렵다고 호소했다. 한방 재료가 들어간 염색약이 좀 덜 가려운 편이라고 추천했더니 덥썩 발라 보겠댔다. 깎새가 염색약을 한창 바르고 있는데 앞거울에 부착해 둔 샴푸 광고 문구를 유심히 보던 손님이 효과가 좋냐고 물었다. 사람마다 체질이 달라서 효과를 봤다는 손님이 있는 반면 손사래치는 손님도 없지는 않아서 무조건 좋다고 장담은 못하겠으나 제품을 다년간 써본 사람으로서 아예 소용이 없으면 제 발 저린 도둑놈마냥 조마조마해서 어떻게 광고를 하겠냐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서 잠깐! 그 샴푸 정체가 궁금할 성싶어 설명을 덧붙이겠다. 10여 가지 생약초를 원료로 해서 만들어서 탈모, 비듬, 가려움증, 지루성 두피염증, 민감성 두피염증에 탁월한 효과가 입증됐다고 점방에 붙여 놓은 광고문에는 적혀 있다. 오래 전부터 샴푸 판매업자와 인연을 맺은 부친이 샴푸와 토닉(그렇게 한 세트)을 정기적으로 도매금으로 받아 점방에 비치해 두고서 탈모나 두피 가려움증을 호소하는 손님들한테 이문 붙여 팔았는데 부수입으로 쏠쏠했다.

개업을 준비하던 깎새한테도 그런 재미를 느껴보라면서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선 점방 서랍장에다 다섯 세트부터 욱여 넣었다. 거기에다 샴푸 판매업자를 닦달해 받아낸 홍보물을 점방 안 앞거울, 벽면 할 거 없이 도배질하는 것도 잊지 않았고. 부친이 강권해 이용사 길로 입문할 때부터 그 샴푸를 써본 유경험자로서 효과가 아주 없지는 않다 해도 '탁월하다'라는 교언영색까지 동원할 만큼 타 제품보다 돋보이는지는 솔직히 의문이었다. 부친 점방에서는 그걸 정기적으로 찾는 손님 수가 제법 되는 걸 보면 꼭 상술로만 볼 게 아닌 성싶기도 하고.

문제는 샴푸 한 통 삼만오천 원, 토닉 오만 원(현재 판매가는 샴푸 사만 원, 토닉 오만오천 원으로 인상했다. 받아오는 제품값이 오르니 어쩔 수가 없었다)을 호가하는 고가로 천연덕스럽게 팔아먹을 만큼 깎새가 그리 뻔뻔하지 못하다는 데 있었다. 한번은 깎새 점방 옆 건물 페인트 가게 주인이 머리 깎으러 왔다가 자기가 지루성 두피염증이 심한데 마침 잘 됐다면서 샴푸 한 통을 사갔었다. 한 달 뒤 다시 머리 깎으러 와서는 효과를 못 봤다면서 엉터리 아니냐고 게정을 부리는 통에 아주 혼쭐이 났었다. 쓰는 사람 족족 특효면 그게 만병통치지 그냥 샴푸겠냐고 둘러대긴 했지만 강매한 것도 아니고 손님 자기가 마음이 동해 샀는데도 괜히 뒤가 구린 것이었다.

처음으로 돌아가서, 초면인 손님 역시 두피 가려움증을 해소할 수만 있다면 양잿물도 마실 기세였다. 염색 바르고 대기하는 사이를 노려 샴푸 설명을 이어가던 도중 손님 핸드폰이 울렸다. 근데 그 손님 폰에다 대고 떠드는 소리가 귀에 설었다. 한국말이 아니고 꼭 동남아 아니면 남미 오지의 원주민이 쓰는 말인 양 생전 듣도 보도 못한 외국어로 유창하게 상대편과 통화를 나누는 게 아닌가. 그 기이한 광경을 지켜보다 어쭙잖은 오지랖이 발동했다. 뭐하시는 분이냐고 물었더니 외국을 자주 나다닌댔다. 기업체 주재원 같아 보이지는 않아서 혹시 무역상이시냐 물었더니 안 그래도 자기 직업을 어떻게 설명할까 고민하던 참이었는데 적당한 표현이라며 반색했다. 말문이 트이자 무역상은 타국 생활의 애환을 털어놓았다. 특히 역병이 돌고부터 외국 나갔다 하면 현지에서 자가격리로 묶이고 한국에 돌아와서도 또 자가격리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자가격리만큼이나 힘들었던 게 두피 가려움증이라고도 했다. 한번은 외국에서 염색을 했다가 머리가 가려워 몇날 며칠 식겁을 해 그 후로는 머리에 관한 한 외제라면 쳐다보지도 않는다고 했다. 그러고는 서랍장 샴푸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왕 속을 양이면 한국 제품으로 속아야 속은 편할 거라면서 깎새 점방에 있던 한방 샴푸 전부(총 4개)를 사겠다고 했다. 십사만 원어치나 되는데 말이다.

사람은 누구나 편견이라는 걸 지니고 산다. 과거 결정적인 무언가에 의해 인식에 깊은 주름이 패여 굳어져 버린 게 편견이 아닐까 싶은데 깎새 머릿속에 각인된 무역상이라고 하면 딱 두 가지만 떠오른다. 무모함과 배포. 성공과 실패가 한 끗 차이인 줄 번연히 알면서도 '이거다!' 싶으면 앞뒤 재지 않고 일단 지르고 보는 무모한 도전의식과 '못 먹어도 고!' 식의 두둑한 배포는 일종의 기호로써 무역상이라는 직업을 대표한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마침내 깎새 앞에 나타나 14만 원어치 샴푸를 두말없이 사는 손님을 통해 형상화되기에 이르렀다! 물건 파는 입장에서야 많이 팔아 신나긴 하지만 한 통만 사서 효과 유무를 파악한 뒤에 결정해도 될 텐데 굳이 성급하게 구는 게 아닌가 염려스러울 정도였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날은 머리 깎아 번 돈보다 더 많은 부수입이 들어와 운수대통했었다.

무역상과 인연은 그날이 끝이 아니었다.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아침 나절에 중년 부부가 점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남자는 그제 그 무역상이었고 여자는 부인인 성싶었다. 무역상은 두피 가려움증이 싹 없어진 게 효과 만점이라면서 다짜고짜 그때 그거 다섯 개 더 달라면서 5만 원짜리 지폐를 한 장 내밀었다. 옆에서 지켜보던 부인이 일단 하나 써보고 나중에 더 사자고 말렸지만 막무가내였다. 전날 제품을 새로 입고해서 이게 웬 떡인가 싶어 샴푸 다섯 개를 꺼내 담는데 어째 좀 이상했다. 다섯 개면 십칠만오천 원을 줘야 하는데 달랑 오만 원이라니?

- 선생님, 그제 사셨던 샴푸는 개당 삼만오천 원짜립니다. 다섯 개면 십칠만오천 원이구요.

- 그래요?

무역상은 알쏭달쏭해하는 눈치였지만 이내 지갑을 꺼내 나머지를 지불했다. 대목 특수를 톡톡히 누리나 보다 속으로 쾌재를 부르면서도 어째 께름칙했다. 샴푸가 아무 때나 찍어 바르는 화장품도 아니니 암만 자주 쓴다 한들 기껏해야 하루에 두세 번이고 샴푸 산 지 이틀 만에 효과가 바로 나타났다면 무역상이 샴푸에 최적화된 인물이거나 샴푸가 변두리 동네 커트점을 전전할 제품이 아닌 것이다. 무역상이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는 예감이 들자 불현듯 샴푸 판 십칠만오천 원은 내 돈이 아니다 싶어 돈통에다 넣지를 못하고 호주머니 속에 쟁여뒀다.

아니나다를까, 그들이 나가고 5분쯤 지났을 무렵 무역상 부인이라면서 연락이 왔다. 남편이 찾은 건 샴푸가 아니고 그제 발랐던 염색약이라면서 남편이 착각한 것 같다고 쭈볏거렸다. 그러면서 환불해 달라고 조심스레 청했다. 저간의 정황을 톺아보니 장면이 완성되었다. 그제 점방에서 발랐던 한방 염색약값은 만칠천 원이다. 염색한 지 이틀이 지나도록 머리가 안 가려운 게 신통했던 성미 급한 무역상이 자기 머릿속은 염색약인데 입으로는 샴푸를 지목했던 것이다.

처음부터 샴푸 판 돈이 자기 것이 아니라고 여기던 깎새가 흔쾌히 환불을 약속하자마자 무역상 부인이 득달같이 달려왔다. 남편이 뭐에 한 번 단단히 꽂히면 앞뒤 안 재고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미라 그 뒷수습은 오롯이 가족 몫이라고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늘어놓는 무역상 부인한테 순순히 돈을 돌려 주고 샴푸를 되돌려 받았다. 샴푸 대신 남편이 발랐다는 한방 염색약을 다섯 개 사겠다면서 미안함을 대신하려고 했지만 재고가 없어 새로 주문을 해야 하는데 이틀 뒤 외국 출장이 잡힌 일정에 맞추자면 빠듯하다고 아까 설명드렸지 않느냐 했더니 처음 듣는 얘기인 양 머쓱해하더니 염색약이 도착하는 대로 연락을 달라는 말을 남기고 퇴장했다. 고의는 아닐지라도 일단 저지르고 보는 무역상 뒷수습에 바쁜 가족들 속이 엔간하겠다 안 해도 될 걱정을 하고 자빠졌던 깎새.

이것으로 샴푸 해프닝이 일단락되었느냐면, 아니다. 또 있다. 그로부터 1시간쯤 지났을까. 무역상 부인이 또 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아닌가. 혹시 그제 산 샴푸까지 환불해 달라는 거면 당신 남편이 자발적으로 구입 의사를 밝히고 구매한 것이니 환불 불가라고 강단지게 거절할 작정이었다. 역시 부인의 입에서 '샴푸'란 단어가 튀어나왔다. 깎새는 긴장 모드로 전환하면서 전의를 불태웠다.

- 샴푸 두 개만 다시 살께요.

추석 대목 손님 받느라 바쁜 깎새 붙들고 요랬다조랬다 한 무역상 자신이 너무 가오 빠진다고 여겼던가 보다. 추락한 위신을 조속히 원상복귀시키자니 물량 공세밖에 답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부인을 채근해 샴푸를 다시 구입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다섯 개는 좀 많고 한 개는 영 없어 보여서 두 개로 낙착을 봐 체면치레하겠다는 심산이 깔렸다고 깎새는 나름대로 분석했다.

이틀에 걸친 샴푸 해프닝으로 무역상하면 떠오르는 무모함과 패기라는 이미지에 공구리를 부어 넣은 듯이 깎새 의식에 더 공고한 편견으로 자리잡은 계기가 된 건 맞다. 아무튼 타국살이 스트레스가 자심할 텐데 샴푸로 그 고단함이 조금이나마 덜하길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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