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중한 연말이지만

by 김대일

2022년 3월 말쯤이니까 개업하고 보름이 채 안 지났을 때였다. 슬슬 마감을 준비하려는데 양복을 쪽 빼입은 중년 남자가 점방 문을 열고 들어왔다. 들어와 연신 굽신대는 품이 어째 께름칙했다.

- 제가 이 동네 40년 넘게 살고 있는데 피치 못할 사정으로 집 밖을 안 나간 지 좀 됐습니다. 오래 처박혀 지내다 보니 머리꼴이 말이 아닌데도 돈이 없어서리···. 아량을 베푸시면 두고두고 잊지 않고 형편 나아지는 대로 꼭 갚겠습니다.

면상은 허여멀끔하고 입성까지 말쑥한 자가 자신을 룸펜이라고 소개하면서 무전無錢 이발을 통사정하니 처음엔 기가 찼다. 고민에 빠졌지만 잠시였다. 개업한 지 얼마 안 된 주제에 모질다는 소문부터 나는 게 장사에는 별 도움이 안 되겠기에 적선하는 셈치고 이발의자에 앉혔다. 그러나 사자 갈기를 연상시키는 덥수룩한 몰골이 이발한 지 댓 달은 족히 넘어 보여 작업에 난항을 예고했다. 30분 가까이 머리털을 붙잡은 끝에 겨우 사람 머리를 만들어 놓으니 중년 남자는 연신 굽신대다가 나가 버렸다. 이후로 지금까지 깎새 점방을 찾은 적이 없다.

시작이 비슷한 다른 이야기를 해보겠다. 3년 전 연말에 익명 기부자 사연이 회자된 적이 있었다. 학비 내기가 빠듯했던 한 고학생은 배가 너무 고파 다음날 지불하겠다고 약속하고 홍합 한 그릇을 얻어 먹었다. 다음 날이라고 돈이 있을 리 없었던 그는 끝내 홍합 한 그릇 값을 못 갚은 채로 미국 이민길에 올랐고 50년 세월이 흐른 뒤에야 감사와 속죄의 마음을 담은 편지와 2천 달러(한화 약 230만 원) 수표를 보내 왔다.


https://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1025043.html


'군 복무를 마치고 미국 이민 길에 올라 지난 50년 간 친절하셨던 아주머니께 거짓말쟁이로 살아왔다. 이제 제 삶을 돌아보고 청산해가면서 너무 늦었지만 어떻게든 그 아주머니의 선행에 보답해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며 돈을 보낸 이유를 밝힌 대목만 몇 번을 읽었다.

그에겐 고통스런 질곡이었던 셈이다. 50년 전 떼먹은 홍합 한 그릇 값에 매겨진 가책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으면 일흔이 된 노인이 청하는 속죄가 그토록 비장한가. 대관절 그 홍합 한 그릇 값이 뭐길래 거짓말쟁이라는 인생의 오점을 지우려는 말년의 집요함인가. 문득 면상 허여멀끔하고 입성까지 말쑥했던 자도 고통스러워할지 궁금해졌다.

어느 해보다 불안하고 엄중한 연말이긴 하지만 '더불어'라는 단어가 더욱 절실한 연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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