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읽는 일요일(185)

by 김대일

역사

마광수


역사책은 참 이상하다. 왕과 장군의 이름만 나온다.

워털루 전쟁 대목에서도, "워털루 전쟁에서 나폴레옹이 졌다" 라고만 돼 있다.

어디 나폴레옹이 싸웠나? 졸병들이 싸웠지.

역사책 어느 페이지를 들춰봐도 졸병 전사자 명단은 없다.

'삼국지'를 봐도,

"적벽대전에서 조조가 제갈량한테 대패하다"라고 되어 있다.

어디 조조와 제갈량만 싸웠나? 졸병들이 싸웠지.



(故 마광수는 생전에 '역사는 발전하는가'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견해를 밝혔다.


역사는 발전하는가. 사상사를 통해서 볼 때 역사의 진보 또는 발전을 믿었던 낙관주의적사상가들은 대개 귀족신분이거나 기득권 엘리트들이었다.

이성에 의한 역사발전을 믿었던 헤겔은 살아 생전 명예와 지위를 누릴 대로 누렸던 운 좋은 사람이었고, 헤겔과는 반대로 염세적 인생관과 부정적 역사관을 가졌던 쇼펜하워는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받아보지도 못하고 교수로 출세하는데도 실패했던 국외자였다.

볼테르나 베르그송같은 역사발전론자들도 다 편안하고 안락하게 살며 별 풍파를 겪지않는 삶을 누렸다. 이성적 낙관주의의 시조라고 할 수있는 데카르트는 온종일 이불 속에서 뭉그적거리며 사색에 빠져도 사치스런 생활이 보장됐던 유한계급의 인물이었다.

마르크스는 다소 예외가 될 수도 있다. 그는 소망하던 교수자리도 못 얻고 평생을 가난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그는 자본주의의 당연한 붕괴에 따른 공산주의 낙원의 도래를 확신했다. 그러나 그 역시 부정 적 인간관에서 그의 유토피아니즘을 출발시켰다고 볼 수 있는데, ‘자본가들에 대한 미칠듯한 적개심’이 없었다면 그의 사상은 나올 수 없었기 때문 이다. 그러니까 그는 공산주의적 이상사회의 도래를 확신하는 ‘발전적 역사관’ 을 핑계로, 가진 자들에 대한 미칠듯한 적개심과 분노를 교묘하게 해소시켰다고 볼 수 있다.

‘민심이 천심’이라 할 때, 내가 보기에 역사의 발전을 믿는 이들은 ‘민심’을 형성하는 쪽에 들지 못한다. 그들은 대개 소수의 귀족 엘리트이거나 기득권 문화인들이기 때문이다. ‘민심’ 을 형성하는 사람들은 그야말로 ‘민중’들이다.

민중엔 도시의 소시민도 들고 농촌의 농민도 들고 공장의 노동자도 든다. 이런 민중들 대다수는 모두다 역사의 전진 방향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세계 도처에서 요즘 종말론적 예언들이 활개치고 기득권 지식인들이 미신이라고 코웃음 치는 갖가지 점술(占術)이 만연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에는 특히 교회가 많고 절도 많고 유사종교도 많다. 그리고 점술가들이 유난히 활개 치며 주요 일간신문을 장식하고 있다. 그리고 대개 다 말세사상을 바탕에 깔고 있는데, ‘민심이 천심’ 이라고 볼 때, 이런 현상을 그저 ‘합리적 지성의 미숙 또는 부재에서 오는 과도기적 현상’이라고 넘겨버릴 수만은 없다.

이런 현상의 진짜 원인은 아직도 우리나라엔 권력에 의한 인권유린이나 가렴주구(苛斂誅求)가 많고 법을 빙자한 자유권의 침해가 많기 때문인 것이다.

한국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의 민중들이 생활의 피로에 지쳐 신음하고 있다. 굶어 죽어가는 아프리카 민중들에게 ‘이성’을 강조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으며, 앞으로 닥쳐올 유토피아를 설명해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집트의 피라미드나 우리나라 경복궁의 장려한 건축미가 민중들을 배부르게 할 수 없고, 그들의 허기진 성욕을 달래줄 수도 없다. 수세식 변기를 공급해봤자 도시의 소시민들은 여전한 박탈감에 시달리게 마련이고, 고상한 철학책이나 전문서적에 매달리면서도 박사 실업자들은 지성의 상아탑 즉, 대학을 증오한다.

역사는 어쨌든 발전한다는 믿음은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실용적 쾌락(또는 행복)을 무시하고, 전체주의적 힘의 추구나 소수 지배 엘리트의 문화만을 역사 안에 편입시켜 생각하는 자들의 오만한 자아도취가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전쟁에서 싸우다 죽어간 억울한 영혼들을 ‘영령(英靈)’이라고 추켜세우며 '역사 발전에 이바지한 거룩한 희생자들’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허무하게 죽어간 무명의 졸병들이 사후에 추앙받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천국은 사후에 오는 게 아니라 살아 생전에 와야만 한다.

2차세계대전 때를 상기해 보면, 그 전쟁은 독일군에게도 성전(聖戰)이었고, 연합군측에게도 성전이었다. 일본의 가미가제(神風) 특공대원들도 천황의 성전승리를 위해, 그래서 역사를 발전시키기 위해 꽃같은 젊음을 날렸다.

데모하다 죽은 이한열군을 역사 발전을 위해 장렬하게 산화한 열사로 떠받든들 그에게 무슨 보람이 있겠는가.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비행사들은 ‘역사 발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투하 명령을 받았고, 원폭에 죽어간 히로시마 시민들은 지금 ‘원자폭탄에 의한 비극이 다시는 생기지 않도록 하기 위해 죽어간 의로운 희생자들’로 추모되고 있다.

역사는 물론 발전하는 것이 좋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역사는 그렇지 못했다. 문화나 이념의 진보를 구실로 일반 민중들이 끊임없이 희생돼 간 것이 지금까지의 역사였다.

피라미드의 장려한 건축미보다 피라미드를 짓다 죽어간 노예들의 억울한 죽음을 심각하게 생각할 수 있을 때, 그때 비로소 역사는 발전할 수 있다. 식욕과 성욕의 고른 충족, 그리고 인권의 고른 보장이 이루어질 수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역사의 진보를 말할 수 있다. (마광수, <역사의 발전에 대하여>, 한겨레신문, 2008.10.21에서)


추악한 민낯을 마침내 드러낸 정치 모리배들은 더 이상 민심을 논하지 말라. 역사의 기요틴 앞에 무릎 꿇려 그 간악함을 반드시 단죄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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