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란성 불안장애가 의외로 지독하다. 점방에 혼자 덩그러니 있으면 TV 뉴스속보를 틀었다가 유투브를 열었다가 어수선하기 짝이 없다. 그렇다고 통쾌한 해답을 얻냐면 그건 또 아니다. 되레 고구마 백 개 먹은 기분만 더럽다.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갈 텐데 괜히 안절부절못하다 심사만 더 편치 못하다. 대국민 신경안정제라는 유시민 작가나 팩트를 바탕으로 시원시원하게 일갈하는 <사장 남천동> 유투브가 그나마 진정제 역할을 해주지만 약발이 그때뿐이라서 혼자서 견디는 방도를 찾지 않으면 진짜 병에 걸릴지 모른다며 걱정이 태산이다.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는 심정으로 집구석에 처박아 둔 교양 서적을 뒤져 본다. 그런다 한들 쉽지가 않다. 딴 데 정신 팔려 있는데 글자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하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사리 내팽개칠 수 없는 까닭은 유시민 작가나 <사장 남천동>이 온종일 떠들지 않는 한 결국 깎새 혼자 이 불안을 잠재울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에서다.
어렵사리 이 책 저 책 뒤져 보지만 마음 다스릴 한 구절 얻기가 참 어렵다. 누구는 한 권의 책이 인생을 바꿔 놨다고 하던데 자기는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다고 깎새는 괜히 분통을 터뜨리며 자책한다. 그나마 엊그제 눈에 살짝 들어온 대목이라는 게 엉뚱하게도 문학평론책에 등장하는 단편소설 평이었다. 이 시국에 소설 평론이 눈에 들어왔다는 게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런데 정말 희한하게도 읽을수록 위로를 받는다. 표면적으로는 소설가의 존재론을 설파하지만 존재하려는 의지를 북돋게 하는 프로파간다인 양 고무된 깎새. 깎새가 참으로 이상한 변태라는 게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다.
단 한 사람이라도 곡괭이를 사용하는 한 곡괭이는 존재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오직 그만이 소설가이고자 해도 소설가는 존재할 수 있다. 그가 그 마지막 곡괭이(소설가)가 되면 어떻겠는가. 그라도 영원히 그 벽을 뚫으면 어떻겠는가. 이 소설의 표면적인 논리대로라면 수영의 노동은 소외된 노동에 불과하다. 그 행위는 그 자신의 정체성을 무無로 왜곡하는 과정에 불과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 보면 그는 벽을 뚫는 동안만큼은 무無가 아니었다. 소설가'인' 상태는 아니었지만, 소설가가 '되어가는' 상태였다. "소설가라는 객관적인 증거"(210쪽)는 심판관의 말대로 책이 아닐 수 있다. 소설가를 만드는 것은 소설가이고자 하는 '의지'일 것이다. 말하자면 수영은 벽을 뚫을 때에만 소설가일 수 있다. 소설가는 '직업'이 아니라 '상태'라는 것. 여기에 소설가의 존재론이 있다. 자기를 증명하기 위한 끝없는 노동, 즉 '소설가가 되겠는가?'라는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 제안을 수행한 자의 관성"(226쪽)이 곧 소설쓰기라는 말이다. 그러니 25미터의 벽이 곧 '현실'이고 곡괭이질이 '소설쓰기'의 은유라고, 혹은 곡괭이가 곧 소설가의 존재 자체라고("그 자신이 완벽한 연장이 되었다는 것을"), 더 나아가 소설가의 윤리는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무한노동의 윤리라고("연장은 미리 벽 뒤를 내다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수인」을 소설가의 존재론과 소설쓰기의 윤리학이라는 관점에서 읽어도 좋겠다. 그렇다면 이기호의 소설가는 곡괭이를 든 노동자이고, 이 소설은 '육체파 소설가'의 자기 선언이다. (신형철, 『몰락의 에티카』, 문학동네, 2008, 634~6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