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접지 말고 구기지도 말고 펴서 내질러라

by 김대일

꽁꽁 숨겨 놓고 자기만 아는 비장의 무기인 양 글쓰기 비법을 전수하려는 사람치고 그 비밀스럽다는 주장이 노골적이면서 영리적이지 않은 게 없어서 안 본 셈친다. 그런데 간혹 글줄이라고 읽던 중에 "글은 이렇게 쓰는 거야"라는 계시라도 받은 듯 눈이 번쩍 뜨일 때면 열일 제치고 일단 베끼고 본다. 그러고는 열 번이고 스무 번이고 줄기차게 되뇌이면서 제발 그 계시가 체화되어 현현하길 바라고 또 바란다.

따로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비장한데 비릿한 생명력이 깃든 문장이 필요했을 뿐이다. 그러다 불현듯 김훈이 눈에 띄였고 마침 『남한산성』, 『칼의 노래』가 집구석 책꽂이에 처박혀 있길래 꺼냈다. 책을 집어들면서 잊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칼의 노래』는 읽었는데 『남한산성』은 사놓고 안 읽었다. 중고책을 막 사들였을 무렵 『남한산성』이란 동명의 영화가 개봉했고 치욕의 역사를 굳이 돌아본다는 게 치욕적이라서 일부러 안 읽고 냅뒀던 기억. 그런데 하필 이제 와서 왜 읽으려 하는지 그 까닭을 책장을 넘기면서도 깎새는 규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소한 우연에서 운명이 결정되듯 소설 마지막 장을 덮은 뒤 계시에 감사했다. 이 가르침을 얻으려고 책을 집었구나!


칸은 붓을 들어서 문장을 쓰는 일은 없었으나, 문한관들의 붓놀림을 엄히 다스렸다. 칸은 고사를 끌어 대거나, 전적을 인용하는 문장을 금했다. 칸은 문채를 꾸며서 부화한 문장과 뜻이 수줍어서 은비한 문장과 말을 멀리 돌려서 우원한 문장을 먹으로 뭉갰고, 말을 구부려서 잔망스러운 문장과 말은 늘려서 게으른 문장을 꾸짖었다. 칸은 늘 말했다.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김훈, 『남한산성』, 학고재, 2007, 284쪽)


남의 생각을 퍼와서 자기 것인 양 떠벌이는 문장, 겉멋만 들어 경솔해진 문장, 깊지 못한 생각을 숨기기에만 급급한 문장, 핵심에 다가서지는 못하고 멀리 겉돌기만 하는 문장, 뼈대가 굵지 못해 자질구레하고 가벼운 문장, 긴밀하지 못한 채 장황하기만 해 지루한 문장.

아, 소설은 간데없고 칸의 엄명만 귓가에 쟁쟁하구나!

- 말을 접지 말라. 말을 구기지 말라. 말을 펴서 내질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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