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사람

by 김대일

깎새는 자기가 예전에 썼던 글을 부러 다시 고치는 버릇이 있다. 설 연휴 쉬는 내내 집구석에 처박혀 먹고 싸고 마시다 싸다 지쳐 유투브를 열어 음악을 듣는데 알고리즘을 타고 전람회 <기억의 습작>에 도달했을 때 멤버였던 서동욱이 작년 12월 사망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알았다. 향년 50.

<기억의 습작>을 들으면 누구는 <건축학 개론>이란 영화가 떠오른다고 하고 누구는 <응답하라 1994>란 드라마가 떠오른다는데 깎새는 재즈 음악가이자 하모니카 연주자인 투츠 틸레망이 짓고 연주한 <Old Friend>가 퍼뜩 떠오른다. 왜냐하면 <기억의 습작>이 기폭제가 된 어떤 글을 쓸 무렵 <Old Friend>가 배경음악으로 흘렀기 때문이다. 투츠 틸레망은 2016년 95세 일기로 사망했다.

기억이 거기까지 미치자 아예 예전 글을 들춰내 또 고치기 시작한 깎새. 똑같은 글을 대여섯 번은 고쳤을 게다. 자기 글에 뻑이 가서? 아니다. 그 글에 등장하는 형이 문득 그리워 그 마음을 달래 보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을 터. 가끔 사람이 보고 싶어도 쉬 만나지 못하는 안타까움 때문에 미치도록 외로움을 절감하곤 한다.



Old Friend


대저 어떤 집단이든 가깝고도 먼 사이일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윗 기수다. 어떨 땐 둘도 없이 친근하다가도 까칠할 땐 그렇게 미워보일 수가 없다. 하지만 준기형은 그런 편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준기형은 같은 고등학교, 같은 대학교 한 해 위 선배다. 대학교에 막 입학해 형을 본 첫인상은 화염병 들고 종주먹 불끈 쥔 채 투쟁가를 목놓아 불러제끼던 지독한 운동권. 하여 박정희, 전두환을 걸출한 영도자로 세뇌 당한 당시 내가 호감을 둘 구석이라고는 전혀 없어야 할 위인이었다.

준기형은 수줍음을 많이 탔다. 형을 아는 이들은 한결같이 형이 친절하다고 극찬했다. 짐작컨대 숫기 없는 형이 타인한테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배려가 친절함으로 비쳤음이라. 이런 왜곡은 선한 왜곡이다. 형이 꿈꾸는 이상향, 거창하게 말해 정치적 이상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투쟁하는 현장에서 드러나는 용맹한 저돌성과는 달리 매사 유약하고 뭉그적거리는 듯싶은데 그런 처신을 두고 또 상대방은 다정함으로 왜곡하기 일쑤인 걸 보면 명징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형만이 가진 매력이 뭇사람을 매료시켰는지 모를 일이다.

준기형 눈에 나란 인간이 어떻게 비쳤을지는 물어보질 않아 잘 모르겠다. 형을 흠모하는 만큼 과연 형은 나를 어떻게 여길지 만약 형을 만난다면 꼭 묻고 싶은 영순위 질문이다. 만약 "그럭저럭 괜찮은 녀석이었고 지금도 그래"라는 대답을 듣는다면 그 어떤 찬사보다 후한 영광일 테다. 뇌를 아예 들어내지 않는 한 결코 잊혀지지 않는 형과 얽힌 추억 한 조각이 어쩌면 형이 나를 변변한 후배로 여겼을 수도 있겠다 여길 만한 단서로 유일하다.

1994년은 내가 대학 졸업반인 동시에 ROTC 2년차였던 해다. 이듬해 졸업하자마자 군 입대가 예정되어 있어서 학생인 듯 학생 아닌 어정쩡한 처지였던 탓에 막연한 불안감이 늘 도사리던, 때늦은 질풍노도의 시기였던 셈이다. 실은 군 입대로 불안했단 건 핑계였고 더 큰 이유가 따로 있었다. 지금도 여전하지만 당시에도 찌질한 천성은 어디 안 가서, 2년 전 일방적으로 결별을 선언하고 뒤돌아 선 동갑내기 여자를 끝내 잊지 못해 괴로워했다.

미련을 못 버린 순정남은 매일매일이 고역이었다. 한때 캠퍼스 커플이었던 여자와 심심찮게 마주치는 일상이 되풀이되어서. 여자가 다니는 길을 피한다고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ROTC 후보생 간부였던 탓에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학군단 건물은 여자가 제 집 안방처럼 드나들던 자기 과 건물 부속 건물이었다. 운 좋으면(?) 하루에도 여러 번 마주치는 여자와 어색한 눈인사로 일별하고 그렇게 돌아설 적마다 실연의 아픔이랄지 사무치는 그리움은 차마 말로 표현 못할 고통이었다. 헌데 사람 마음이란 간사해서 그렇게라도 상면하는 게 한없이 좋아서, 영영 이대로 띄엄띄엄 두고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면 됐지 싶다가도 졸업하고 나면 이 모든 게 끝이라는 생각에 미쳐 착잡해진 마음은 위태롭게 휘청댔더랬다.

그해 화창한 가을 어느날이었다. 그날따라 하늘은 유난스레 높고 맑았다. '말 안 해도 네 마음 다 안다'는 듯이 준기형은 울적한 나를 사회대 앞 너럭바위로 데려갔다. 신문방송학과를 다녔던 형이 주로 드나들던 사회대 건물은 교내에서 제법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서 경관이 좋고 우선 고즈넉했다. 그 구역 명물이나 다름없던 너럭바위에 누워 하늘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잠시나마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벌렁 드러누워 하늘만 초점없이 바라보는데 형이 꽂고 있던 이어폰 한 쪽을 불쑥 건넸다. <기억의 습작>. 예리한 비수로 곪은 상처를 째고선 고름을 짜내듯 아리고 쓰린데 말로는 표현할 길이 없는 후련함은 대체 무슨 조화였을까. 창피하기도 하고 북받치기도 해서 속으로 속으로 마구 울었고, 우니까 나는 정화되었다. 수줍음 많던 형이 내게 건넨 따뜻한 위로였다.

계절이 바뀌거나 해가 바뀔 적마다 유독 생각이 나는 준기형이다. <Old Friend> 하모니카 멜로디가 꼭 준기형을 닮았다. 형이 무척 그립다.


https://youtube.com/watch?v=2T8wyBqBN9k&si=MuYTFmIMaGKNx9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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