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틈이 시를 읽는 속셈이 저열하고 타산적이다. 시에 기대 사람의 본바탕을 개조시켜 보겠다는 심산?
시가 그토록 대단한가. 그렇다면 시는, 있으면 좋은 것인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인가. 소설과 영화와 음악이 없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면 시 역시 그렇다. 그러나 언어는 문학의 매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삶 자체의 매체다. 언어가 눈에 띄게 거칠어지거나 진부해지면 삶은 눈에 잘 안 띄게 그와 비슷해진다.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마음들이 계속 시를 쓰고 읽는다. 시가 없으면 안 되는 것이 아니라 해도, 시가 없으면 안 된다고 믿는 바로 그 마음은 없으면 안 된다. (신형철,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한겨레출판, 2018, 260쪽)
시 평론가 데이비드 오어가 그의 책 『아름답고 무의미한(Beautiful & Pointless)』에서 보고하기를, 어떤 임의의 X에 대해 '나는 X를 좋아한다'와 '나는 X를 사랑한다'의 구글 검색 결과를 비교해보면, 대체로 '좋아한다(like)'가 '사랑한다(love)'보다 세 배 더 많다고 한다. 예컨대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가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에 비해 훨씬 많다는 것. X의 자리에 '영화', '미국', '맥주' 등등을 넣어도 역시 마찬가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시(poetry)'만은 결과가 반대여서 시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사람이 두 배 더 많다고 한다. 왜일까? 나로 하여금 좀 더 나은 인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사람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훌륭한 시를 읽을 때, 우리는 바로 그런 기분이 된다. (같은 책, 262쪽)
난감한 점은 시를 읽지만 시를 잘 읽을 줄 모른다는 데 있다. 하도 답답해서 어떻게 하면 시를 잘 읽을 수 있을지 소위 시 전문가가 쓴 책을 시 옆에 꼭 대기시켜 놓는다. 교과서 옆에 참고서 둔 격이지만 옥상옥屋上屋이 따로없다. 그럼에도 시 독법은 늘지 않고 제자리만 맴돈다.
시 한 편을 온전히 읽어 시상을 풀어낼 수만 있다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거란 믿음에는 변함이 없다. 성격이 다른 독해력을 요하다 보니 산문처럼 읽는 게 능사가 아닌 줄 알면서도 시를 놓지 못하는 까닭이겠다. 더불어 교사이면서 시인이며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대학 동기녀석 훈수가 그렇게 하지 않고는 못 배기게 명토를 박아 버렸다.
부단히 써야 좋은 글이 나오지만 그걸로는 부족하다. 남이 쓴 좋은 글도 부단히 읽어야 한다고. 그러니 읽는 걸 게을리하지 말라고.
줄기차게 읽다 보면 뭔가가 드러날 수도 있다는 뜻이겠는데 '어리석도록 우직해라'로 들려 훈수치곤 좀 건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