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족 유대감

by 김대일

예능이건 드라마건 여자족이 주역이면 일단 믿고 보는 편인 깎새. 작년 한 해로만 좁혀 보자면, <텐트 밖은 유럽> 시리즈 중에서도 최근작인 <텐트 밖은 이탈리아>는 단연 눈에 띈다. 여배우 4명이 이탈리아로 배낭여행을 떠나는 컨텐츠로 깎새는 다른 어떤 시리즈보다 흥미롭게 봤다. 낯선 세계에 발 내딛기로는 매한가지이면서도 신세계를 대하는 반응은 훨씬 아기자기하고 신박하기 그지없는 여자족. 시리즈에 등장했던 여자족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뜻하면서 솔직했던 종족을 본 적 없다고 깎새 제 마음대로 명토를 박다.

여성국극을 소재로 한 드라마 <정년이>는 또 어떻고. 근자에 본 드라마 중 최고로 치는 데 서슴지 않는 깎새. 여자만으로도 꾸려가는 힘이 꿋꿋했고 플롯, 인물, 연기 뭐 하나 빠지는 것 없이 완성도가 너끈했다. 주인공이 때론 밉지 않은 빌런으로 행세한다거나 그 반대로 동료들과 연대해서 예술적 성취를 이뤄가는 서사는 한 인물에만 초점을 맞춘 성공담이기보다는 주인공인 여자와 관계 맺은 여자족 모두의 성장기이기에 남자족 일기당천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최근에 종영된 <원경>도 만만치가 않다. 서사의 중심을 이방원이 아닌 '킹메이커' 원경왕후에 맞췄다는 발상의 전환이 일단 신선했다. 무엇보다 분열적인 이방원으로 상징되는 과잉된 남성성의 폭주, 그 속에 숨겨진 지질함 혹은 비겁한 내면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되우 높다. 다음은 황진미 대중문화평론가가 밝힌 <원경> 감상평 일부다.


애초에 불평등한 부부 사이인데 애증의 팔만대장경을 써본들 무슨 의미가 있냐는 불만도 있을 수 있다. 둘의 관계는 내용적으로는 대등하나 형식적으로는 불평등한 가부장적 부부관계의 모순을 잘 드러낸다. 또한 부부 사이에 전쟁처럼 끼어드는 시가와 처가의 역동을 잘 보여준다. 말 그대로 '적과의 동침'이다. 어디에 전선을 그을 것인가. 피아 식별을 제대로 못 하면 남편이 아닌 남의 편, 즉 원수가 된다 .원경왕후가 하필 용렬한 남자를 골라 뒤통수를 맞은 게 아니다. 어쩌면 그것은 필연이다. 권력의 속성이기도 하고, 남성성의 본질이기도 하다. 남성성의 폭주 속에는 비겁함이 숨어 있다. 시대와 버전은 다르지만, 과잉된 남성성 속 지질한 내면의 향연을 날마다 뉴스로 실시간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황진미의 그거 봤니?-원경>, 한겨레, 2025.01.24 에서)


동물학자인 최재천 교수가 호주제 폐지에 앞장서며 강력하게 설파했던 "유전학적 호주는 여자다"는 <할머니 가설>과 일견 상통하는 데가 있다. 미국 진화생물학자 조지 윌리엄스가 1957년 과학 저널 <네이처>에 발표한 논문에서 처음 제시했다는 <할머니 가설>은 포유동물 중 드물게 인간 여성에게 나타나는 폐경 현상에 대한 진화적 해석이라고 했다. 수전 P. 매턴은 『폐경의 역사』(조미현 옮김, 에코리브르, 2020)라는 책에서 생식의 짐에서 벗어난 할머니 존재가 인류 집단의 존속에 도움을 주기 때문(나이 든 포유류 암컷은 직접 아이를 낳기보다 생식을 중단하고, 자신의 유전자를 이어받은 아이(주로 딸)가 낳은 손주를 돌보는 일이 집단을 든든하게 번성시키는 데 훨씬 더 도움이 된다는 것)에 일정 나이가 지나면 아예 더 이상 번식하지 못하도록 하는 진화적 특성이 고착됐다고 했다. 그런 할머니 역할이 무려 3만 년 전부터 사회적으로 그 의미가 지대했다는 글도 있다.


할머니들은 자기의 자녀가 아니라 자기의 자녀가 낳은 자녀 즉 손자손녀를 돌보고 자녀 양육에 필요한 여러 가지 지식을 전수함으로써 가족 집단을 번창시켰다는 것이지요. 최근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약 3만 년 전 현생인류의 조상인 호모사피엔스(크로마뇽인)는 그 이전의 네안데르탈인에 비하여 노년층의 비율이 무려 다섯 배나 증가했음을 밝혀낸 것이지요. 노인 세대의 비율이 급증한 시기는 바로 폭발적인 인구 증가가 있었던 시기였으며 인류가 장신구를 사용하고 동굴벽화를 그리고 장례 행위를 시작한 때와 일치한다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이 든 세대의 경험과 역할이 현생인류의 양적 팽창과 질적 발전을 가져온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할머니 역할은 그 사회적 의미에 있어서 오늘날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지요.(신영복)


여자족은 나이가 들어 할머니가 된다. 할머니 역할을 담당하는 유전자가 잠재하고 있다가 나이가 들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활성화되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지 모른다. 어린아이가 할아버지보다 할머니를 더 선호하는 까닭은 노인 냄새가 덜 나서가 아닐 게다.

굳이 '사회적 모성주의'를 끌어다 쓰지 않더라도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찌든 일그러진 사회상을 바로잡기 위해선 세련되면서 섬세한 여자족 특유의 유대감이 시급하다. 탄핵을 주도한 이른바 '빛의 혁명'의 주체가 응원봉을 든 2030 여자족이었다는 점은 시대적 변화가 이미 시작되었음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다행스럽게 여긴다. 하여 깎새는 비록 남자족들로부터 배신자라는 낙인이 찍히고 조리돌림을 당한다 한들 여자족이 분발할 수 있도록 더욱 가열차게 응원하고 사랑하겠노라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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