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밤 기별

by 김대일

야밤에 전화벨이 울리면 잠결이라도 긴장한다. 게다가 어지간해선 먼저 걸 것 같지 않은 녀석이 발신자로 뜨면 십중팔구 부고다. 하지만 그날 밤은 좀 달랐다. 그 녀석 양친은 별세한 지 꽤 되었는지라 비보만은 아닐 걸 알고 안심했는지 자던 잠 꼬리를 끝내 놓지 못했다. 그러다 문득 그날 밤이 떠올라 녀석한테 연통을 넣었다. 예상은 크게 빗나가지 않아서 늦은 저녁 반주 한 잔 걸치다 울적한 심사 달랠 겸 연락했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는 녀석이 고마웠다.

살면서 녀석을 시기하거나 증오하는 사람을 본 적 별로 없다. 수수하고 털털한 기질이 가볍다고 질타한 밴댕이 몇몇은 있었는지 몰라도 기실 녀석처럼 따라 하지 못해 부린 투정이나 다름없다. 거짓말 좀 보탠다면 녀석은 만인이 친구로 지내고 싶어하는 '난놈'이다. 녀석 스스로는 극구 부인하지만 녀석 주변으로는 어울리고 싶어 안달인 사람들로 득시글거린다. 친절한데다 명랑하기까지 한 녀석은 공사다망한 개인사 때문에 만날 약속을 잡지 못하는 것에 진심으로 애석해하면서도 상대가 누구건 일단 만남이 성사되면 그 자리에서 성심을 다해 응대한다. 그러니 상대방은 녀석을 향한 호감도가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다.

그런 '난놈'한테서 연락이 왔으니 감개무량하지 않을 수 있겠나. 잊을 만하면 기별을 넣어 주는 그 성의가 우선 감사하고 30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음 씀씀이가 한결같아서 감동은 더욱 벅차다. 친구라는 존재에 어떠한 속물적 잣대를 들이대는 법이 없는 녀석이다. 친구면 그냥 친구지 부귀하고 빈천함으로 가깝고 멀게 나누는 법이 없는 녀석이라 누구 앞이라고 비굴해하지도 누구 앞이라고 뻐기는 일 없다. 개구쟁이처럼 짓궂다가도 그 허물없음으로 상대를 일거에 무장해제시켜 버리는 탁월한 친화력, 무심한 척 상대를 배려하는 데도 능란해 마치 츤데레 업그레이드 버전인 양 은근하게 전개하는 다정다감, 선천적으로 타고났다고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 없는 해학과 위트 범벅인 말솜씨는 녀석을 처음 알게 된 고2 시절로부터 지금까지 일관된 녀석의 시그니처이다.

세월물 먹었으면 변해야 그게 사람이라고 누구는 강변하지만 세상 사람 다 변해도 녀석만은 안 변하기를 진정으로 바라는 깎새. 번듯한 가정 꾸려 오순도순 잘 사는 위로 두 형과는 달리 마음 맞는 짝을 여태 못 찾아 독수공방하는 자기 신세에 진절머리가 난다거나 학창 시절로부터 비상한 수재 소리를 곧잘 들으며 창창한 미래를 꿈꿨음에도(정작 본인은 별 생각이 없는데 주변에서 김칫국만 실컷 퍼먹은 혐의가 짙지만) 나고 자라던 동네로 돌아가 기껏 인테리어 사무실 조붓하게 꾸리는 데 그친 처지에 때늦은 현타가 오면 어쩌나 두렵다. 그게 빌미가 되어 녀석이 여지껏 견고하게 일궈왔던 일관성의 세계에 균열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노파심. 물론 심지 굳은 녀석이라 기우에 불과할 테지만 나이 먹을수록 약해지고 무뎌지는 게 또한 사람인지라 통화를 마친 뒤 썩 개운치 않은 여운 탓에 슬그머니 심란해졌다.

작가의 이전글진정한 품격과 지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