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롯가수 전성시대다. TV를 켜면 트롯가수들로 점령당했다. 노래를 부르고 예능감을 맘껏 발휘하며 안 끼는 프로그램이 없을 지경이라 요즘엔 트롯가수가 아니면 방송국이 안 굴러간다는 착각이 일 정도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건 인지상정인지라 대세일 때 유명세 타고 돈 많이 버는 걸 시기할 수는 있어도 멸시하는 건 지나치다. 하지만 채널 돌렸다 하면 여지없이 들리는, 요즘 트롯가수가 부르는 요즘 트롯이 깎새는 영 껄끄럽다. 거의 조각상처럼 깎고 다듬은 외모에 구절양장처럼 꺾어제끼는 구성진 음색이야 나무랄 데 없지만 오히려 그것 때문에 더 듣기가 거북하다. 목이 타는 목소리가 아니라서.
오래 되어 가물가물한데, 신인 가수들이 나와 트롯 경연을 하는 TV 프로였다(타이틀조차 기억이 없는 까닭은 아마도 <미스터 트롯> 류처럼 시청률 재미를 크게 못 봐서일 게다). 거기서 듣도 보도 못한 신출내기가 나와서 배호의 <누가 울어>를 부르는 장면을 우연히 봤다. 엔간해선 채널을 돌려 버렸을 테지만 숫제 피를 토하듯 열창을 하길래 클라이맥스 대목인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는 과연 어떻게 소화할지 내심 기대했다. '아, 이런 식으로도 배호를 영접하는구나!' 모처럼 귀호강은 했지만 그 가수 본선은커녕 2회전에서 떨어졌다.
배호 노래하면 떠오르는 지인이 있다. 배호처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조 형은 트롯 메들리를 구성지게 뽑았다. 고교 동아리 한 해 위 선배였던 그가 부르던 트롯 메들리를 동아리 행사 때 두어 번 들었을 뿐이지만 어찌나 파격적이었던지 그 잔상이 아직도 뇌리에 깊이 파여 있다. 당시 호응이 폭발적이었던 데는 탁월한 레퍼토리 선정이 한몫 했을 거이다. 게다가 곡에서 곡으로 넘어가는 수완은 간드러졌고 아직 덜 여문 나이였음에도 중후한 중저음이 청중을 들었다 놨다 하는 신기를 유감없이 발휘해서였겠다. 트롯이 사람 애간장을 녹일 수 있다는 걸 깎새는 그때 처음 경험했다.
하도 오래전 기억이라 메들리 레퍼토리를 일일이 열거하지 못하겠다. 불귀의 객이 된 지 오래인 당사자한테 물어볼 수도 없는 노릇이니 알 길은 영영 없다. 다만 조 형의 서글픈 중저음 바이브레이션하며 슬쩍슬쩍 비치던 보헤미안적 기질로 미루어 보건대 형이니까 골랐을 곡들 중에 배호 노래가 안 끼면 구색이 안 맞았을 성싶다. <안개 낀 장충단 공원>, <돌아가는 삼각지>, <누가 울어> 뭐든 간에 말이다.
단편소설 「그 악사樂士의 연애사」에는 첫사랑이 생각나면 배호 노래를 부르는 여자가 등장한다. 여자는 배호 노래의 특징을 '목이 타서 물을 찾아 헤매는 사람의 창법'이라고 했다.
나무의 기운을 받고 태어난 배호는 사주에 물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평생 갈증에 시달린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저렇게 물기를 찾아 방황하는 목소리를 내는데 그것을 수음水音이라고 한다. 수음의 특징은 어둡고 축축하다. (한창훈, 『그 남자의 연애사』, 문학동네, 213쪽)
남은 자들 심금만 울려 놓고서 이른 나이에 먼저 떠나 버렸다는 점에서 배호와 조 형은 닮은꼴이다. 시니컬하면서도 무언가를 끊임없이 갈구하던, 딱히 똑부러지게 규정짓지 못하는 고독감에 휩싸였던 생전 조 형이었기에 목이 타서 물을 찾아 헤매는 배호 노래는 안성맞춤이었을지 모른다. 어둡고 축축한 수음을 타고난 배호 노래만 불렀다간 그걸 듣는 어린것들이 무슨 몹쓸 짓을 벌일지 모르니 돼먹잖은 뽕짝 메들리에다 섞어 환심을 샀을 뿐인데 그게 뜻하잖게 형의 시그니처가 됐다.
바리캉을 잠시 멈추고 '피가 맺히게 그 누가 울어 울어'를 속으로 따라불렀다. 트롯은 트롯인데 목이 타서 물기를 찾으려는 목소리가 드문 요즘, 배호와 조 형을 그리워하다 울컥 치민다.
https://www.youtube.com/watch?v=MOr1dY1iQ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