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전에 인생 최초의 폭음을 하게 만든 대학 동아리 <솔트>에 관한 글을 업로드했었다. 내가 나온 대학교로 진학하는 내가 나온 고등학교 졸업생들이 점점 줄어든 탓에 동문으로 인원을 채워야 하는 <솔트>는 현재는 명맥이 끊겼다. 하기사 학교 부지를 같이 썼던 중학교가 2020년에 완전 폐교되었을 정도로 지역 청소년이 급감해 고교 입학생이 130명도 채 안 되는 상황에서 1980~90년대처럼 내가 나온 대학교로 100명 가까이 진학시킨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 같은 고교 졸업생이지만 이름만 달리한 동문 동아리가 4~5개나 되었던 건 그렇게 우후죽순 생겨도 충분히 인원을 채울 만큼 내가 나온 대학교엘 진학하는 졸업생들이 많았기 때문이겠다.
나는 솔트 13기다. 1991년 학번이니까 계속 신입생을 받았다면 올해 기수는 43기겠다. 솔트 13기 동기들을 다 기억할 수 없어서 정확하게 몇 명인지 모른다. 어림잡자면 남자와 여자 비율이 거의 1:1로 각각 열댓 명씩은 되었을 게다. 남자 동기들 중에 죽지는 않았는데 연락이 두절된 녀석 한둘을 빼곤 어디서 뭘 하는지 정도는 안다. 헌데 여자 동기들은 연락이 되는 한둘 빼고는 어디서 뭘 하는지 도통 알지 못한다. 그나마 주워 들은 소식도 카더라통신으로 전혀 믿을 게 못 되고.
13기 여자 동기들 얼굴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사라진다. 한시도 안 떨어지고 놀고 싶었던 대학 초년생 시절이 지나고 군대가 현안으로 불거질 무렵이면 남학생들은 대학 생활 전반부를 매듭지으려는 충동이 강해진다. 휴학계를 내고 도살장에 끌려 가는 소 심정이 된 남학생은 있는 정도 떼려 하고 파리 끈끈이보다 더하면 더했을 끈끈한 유대감조차 심하게 균열이 가는 건 불가피했다. ROTC로 4년 내리 학교를 다녔던 나도 국방의 의무를 짊어지고 남자 동기들이 하나둘 떠나고 난 뒤에는 여자 동기들을 교정에서 만난들 흥이 안 날 뿐더러 영 어색하고 서먹서먹했다. 여자 동기들은 그들 나름대로 대학의 낭만을 짧게는 1년 길어도 2학년까지 즐겼으면 충분했으니 이후로는 먹고 살 궁리에 열중하겠노라 도서관이다 강의실로, 혹은 다른 실질적인 방안(예를 들면 결혼을 위한 신부 수업)을 모색하려고 두문불출해서 동기란 말이 무색해질 정도로 관계가 소원해졌다. 그러다 졸업해 살 길 찾아 다들 흩어졌고 여자 동기들이 졸업하자 남자 동기들이 속속 복학해 여자 후배들 밥, 술을 사주는 호구 노릇을 하다가 눈이 맞아 부부의 연을 맺은 이들도 간혹 있는가 보더라.
이름은 안 떠오르는데 여자 동기들 얼굴이 선명한 건 무슨 조화인지 모르겠다. 이름보다는 이미지로 사람을 새기는 오래된 습벽 때문이겠지만 여자라는 족속과 그것도 떼로 거의 매일이다시피 같이 술 퍼마시고 니나노 장단에 흥청망청하다 서로 부둥켜안고서 울고 불고 난리 부르스를 친 건 대학 입학해 난생 처음이라 이름은 까먹었을지언정 함께 난장을 친 공모자들의 인상만은 절대 잊힐 리가 없어서다.
사범대생(윤리교육학과)다운 조신함보다는 특유의 친화력과 카리스마로 남자한테 전혀 꿀리지 않는 뚝심을 지닌 정1(이름을 아는 동기는 끝자만 달겠다. 정으로 끝나는 이름이 제법 있어 이름자 뒤에 번호를 매기겠다)은 울산에서 교사로 잘 살고 있는가 보더라. 학창 시절 그녀 주변을 배회하며 환심을 사려는 남자들을 당근과 채찍으로 잘 요리하던 모습을 보며 나 혼자 '팜므 파탈'이란 별명을 붙였다. 그녀만이 가진 독특하고도 치명적인 매력이 분명 존재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그녀의 아우라에 포섭되지 않았다. 화학과 희와 연애질하느라 정신이 쏙 빠져 있었으니까.
희에 대해서는 별로 말하고 싶지 않다. 늘어놓게 되면 한도 끝도 없을 텐데 그러는 게 왠지 부질없는 짓 같아서다. 그래도 혹시 궁금하면 그녀를 글감 삼아 간간이 끼적댄 것들이 지난 글 목록을 뒤져보면 솔찮으니 그걸로 갈음하고 다음 인물로 넘어가겠다.
13기 동기들 사이에서는 아직도 술안주로 회자되곤 하는 삼각 관계의 중심에는 정2(일문학과)가 있다. 남자 동기인 모가 정2를 죽도록 좋아해서 술 먹은 늦은 밤 집까지 바래다 준다 어쩐다 지극 정성을 들였지만 정작 정2는 완한테 마음을 뺏긴 상태였다. 정2가 양다리를 걸친 건 아니었다. 무모하리만치 적극적이었던 모한테 인간적으로 미안했던 정2가 그런 상황이 당황스러운 나머지 미온적으로 대처했으리라 나는 짐작한다. 마음 가는 이가 따로 있는 자기를 좋아해 주는 게 고마워 매몰차게 대하지 못하는 정2. 그걸 또 모는 지독하게 착각했을 테고. 정2와 완의 관계를 알아채고 상심한 모가 광부가 되겠다고 홀연히 강원도로 떠나면서 한 편의 청춘 드라마는 막을 내렸지만 그 당시 삼각 관계는 내게 뭔가를 쓰지 않으면 안 되게 만드는 영감을 끊임없이 제공한다. 그만큼 극적이었다는 소린데 인도네시아 용이한테 전해 들은 비하인드 스토리는 희비극이 교차하지만 오늘 주제와는 동떨어져 제외시킨다. 죽고 못 살 것 같던 완과의 교제는 얼마 못 가 파투가 났고 이후로 정2를 동기 모임에서 보는 게 힘들어졌다. 교정에서 오다 가다 눈인사 몇 번 나누다 졸업했다. 그 뒤로 소식이 완전히 끊겼다. 작년에 끼리끼리 연락 닿은 동기 대여섯 명이 서울에서 조촐하게 송년 모임을 가졌을 때 인천 송도에 산다는 정2가 참석했고 모가 그녀를 환대했단다. 기발하고 엉뚱한 걸 갈구하던 나로서는 그 현장에 없었던 게 두고두고 아쉽다.
서울에서 직장생활 하던 총각 시절, 하루라도 빨리 장가 보내려고 안달이 난 부친이 하루는 중신 들어왔다면서 급히 귀향하라고 엄명을 내리셨다. 거역했다간 신간이 안 편하단 걸 직감한 나는 주말에 부산행 새마을호를 타고 여자가 기다리는 광안리 한 레스토랑엘 갔다. 동사무소 공무원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여자 얼굴이 하도 낯이 익어 호구 조사하듯 이것저것 맞춰 보니 솔트 동기였다. 입학 직후 반짝 합류하다 제 갈 길 간 그녀(사회복지학)의 이름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고기 썰고 커피 마시며 두어 시간 보내다가 서로 깔끔하게 헤어졌는데 차마 먼저 말 못한 내 속엣말을 어떻게 알았는지 그녀가 귀신같이 대신 꺼낸 덕분에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동기끼리 무슨 중매냐고.
걸걸한 여걸의 풍모를 지닌 원(법학)은 교도관 남편과 함께 대한민국 교도 행정을 책임지는 중이라고 들었고 몇 해 전 인도네시아로 가기 전인 용이와 셋이서 당일치기 통영 여행을 다녀온 뒤로는 도통 연락을 못한 경(독문학)은 여전히 골드미스를 고수 중일까. 전공(통계학)과는 무관하게 부산의 한 쇼핑몰에서 옷을 팔고 있더라는 뽀샤시해서 무척이나 고왔던 정3은 고상한 부티크 사장님이 되었을까. 호리호리한 몸매에 이국적인 마스크로 기상 캐스터로도 활약한 아(대기과학)는 나이가 들었어도 예전 그대로 아름다운 자태를 품고 있을 테지. 이름이 안 떠올라 분자생물학과, 수학과, 심리학과 따위 학과명으로밖에는 부를 수 없어 미안한 다른 동기들 또한 그들 각자의 삶에 충실할 게 틀림없다.
솔트 13기 동기들 전부 다시 한자리에 모일 확률은 거의 없다. 추억팔이로 여가 선용하지 않은 다음에야 시간에 돈까지 축날 이벤트를 꾸밀 한량이 동기들 중에 내가 아는 한 없다. 마음이야 달나라를 수십 번은 다녀왔을 테지만. 그러니 소가 되새김질하듯 재미졌던 시절을 슬며시 끄집어내 엎어 치고 메치면서 말라비틀어진 감정을 드잡이하듯 달랠 수밖에. 이러는 내가 좀 많이 서글프긴 해도 말이다. 명절 앞이라 그런지 애들이 더 보고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