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취되었나 압도되었나

by 김대일

내란 우두머리 말고 요즘 세간의 이목을 끄는 인물은 요리 사업가이자 방송인인 백아무개다. 그를 둘러싼 논란이 끊이질 않자 깎새는 느닷없이 미국 영화배우인 헤이든 크리스텐슨이 떠올랐고 가면 증후군이라는 심리 현상이 꼬리를 물었다. 가면 증후군이란 자신의 기술, 재능, 성취를 의심하고 사기꾼으로 드러날 것을 속으로 두려워하는 것이 지속될 때의 심리적 현상을 말한다.유능성이 외부적으로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면 증후군을 겪는 사람들은 성공이나 운을 누릴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위키백과 인용). 이런 가면 증후군이 헤이든 크리스텐슨이란 영화배우와 무슨 관련이 있냐고 묻는다면 영화 <스타워즈>를 빼놓고 이야기할 수가 없다.

헤이든 크리스텐슨은 <스타워즈> 프리퀄에서 다스 베이더의 젊은 시절을 연기한 배우로 유명하다. 그는 <스타워즈>에 출연하기 전에 이미 골든글로브 시상식 남우조연상 후보에까지 오른 촉망받는 배우였다. 하지만 <스타워즈> 출연 이후 연기력 논란에 휩싸인다. 여기서 삐딱한 문체가 인상적인 김도훈 허프포스트 코리아 편집장 칼럼을 끌어오면 다음과 같다.


모두가 <스타워즈: 클론의 습격>(2002)을 기대했다. 다스 베이더라는 악당으로 거듭나는 아나킨 스카이워커 역은 아무나 맡을 수 있는 배역이 아니었다. 노예 출신 아나킨은 제다이로 훌륭하게 성장하지만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분노와 불안 등 복합적이고 분열증적인 마음의 진앙을 겪으며 악의 세력에 영혼을 바치고 마는 남자다. 셰익스피어 비극의 주인공이라 할 법한 캐릭터다. 바로 전 해 골든글로브 후보에 오른 촉망받는 젊은 배우에게는 경력을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는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기대는 영화가 공개되자 무너져 내렸다. <스타워즈: 클론의 습격>에서 그의 연기는 눈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발 연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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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개봉한 <스타워즈: 클론의 습격> 속편 <스타워즈: 시스의 복수>에서도 여전히 어색하고 뻣뻣한 연기를 이어간 헤이든 크리스텐슨은 꺼져가는 그의 경력에 다시 불을 붙이기 위해 몇몇 영화에 출연했지만 실패했고 이후 잊혀졌다. 2015년 인터뷰에서 <스타워즈> 출연이 그에게 ‘가면 증후군’을 안겼다고 고백했다. 가면 증후군은 갑작스러운 성공을 거둔 사람이 자신의 실력을 끊임없이 의심하게 되는 심리적 장애다. “<스타워즈>가 저에게 더 많은 기회와 화려한 경력을 안겨주게 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저에게는 너무 벅찬 것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나도 한때는 잘나갔지’라는 생각만 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는 일입니다.” (<김도훈의 낯선 사람 헤이든 크리스텐슨-‘스타워즈’가 독이 된 불운의 다스 베이더>, 한겨레신문, 2023.06.10.에서)


칼럼이 헤이든 크리스텐슨이란 영화배우가 겪은 속앓이 따위 가십거리만 소개하는 것이라면 관심조차 두지 않았을 테지만 가면 증후군을 보다 심도 있게 풀어내기 위한 일환이었다면 얘기가 달라진다. 과연 필자는 가면 증후군을 얘기하기 위해 헤이든 크리스텐슨을 끌어들였다고 고백한다. 필자 역시 매체 편집장을 맡았던 5년 내내 가면 증후군을 겪었다면서 말이다. 그러면서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갑자기 높은 자리를 맡게 된 사람은 두 종류로 나뉜다고 했다. 스스로의 성공에 도취되거나, 혹은 스스로의 성공에 압도된다. 도취되는 건 즐거운 일이지만 압도되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내가 이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인가’를 계속 고민하는 것은 중책을 맡은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이라면서.


그 고민이 끝없이 계속되는 순간 마음은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한다. 바닥으로 떨어진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필요한 건 잠시 멈추는 것이다. 도취된 사람들은 멈추지 않는다. 압도된 사람들이 멈추는 건 영 부당한 일이다. 어쩌겠는가. 한국 정치인들은 대부분 전자인데, 우리 모두가 한국 정치인들처럼 살 수는 없는 일 아니겠는가. 헤이든 크리스텐슨은 멈추었다. 할리우드를 떠났다. 자신이 소유한 농장에서 거주하며 평범한 삶을 살았다.(같은 칼럼에서)


'압도돼 멈춘다'에 방점을 둔다면 가면 증후군은 충분히 가치가 있다. 대단하건 하찮건 간에 그 이룬 바를 과소평가하는 자세는 적절한 처세라고 본다. 살면서 맛보는 성공의 달콤함이야 말해 뭐하겠는가마는 그 성공이 실은 운칠기삼의 요행일 뿐이라 치부하면서 혹시 모를 실패의 충격을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일종의 방어기제로 가면 증후군이 발동된다면 꽤 괜찮은 전략인 게다.

필자가 밝힌 대로 압도되어 바닥까지 떨어져 내리겠다 싶으면 잠시 멈춰야 한다는 것. 멈추고서 냉철해진다는 것은 성공 뒤에 도사린 실패의 후폭풍을 더 염려한다는 의미일 테니 하늘에서 떨어진 이카로스처럼 무모하진 않다는 반증이리라. 저잣거리 한낱 깎새조차도 '지금 내가 제대로 하고 있는 게 맞나'하는 회의를 거둔 적이 없건만 바닥을 모르고 급전직하하는 백 아무개는 그간 대단한 승승장구에 도취되었나 압도되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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