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극작가의 뜻에 따라 결정된 연극 속의 배우라는 것을 기억하라. 작가가 연극이 짧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짧을 것이고, 길기를 바란다면 그 연극은 길 것이다. 작가가 너에게 거지 역할을 맡긴다면, 이 역할조차 또한 능숙하게 연기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라. 작가가 너에게서 절름발이, 공직자, 평범한 사람의 역할을 원한다고 해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너는 그 역할을 해야만 하고, 너에게 주어진 그 역할을 잘 하는 것이 너의 일이기 때문이다. (에픽테토스 『엥케이리디온』17장 에서)
인생이 허무하다는 걸 느낄 나이다.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은 그 허무가 겨우 부지하고 있는 생기마저 빨아먹고 있지 않은지는 각박한 세태를 보면 짐작할 수 있다.
떨쳐낼래야 낼 수 없는, 잔잔한 물결에 파문이 일 듯 마음을 자꾸 쑤석거리는 허무를 애써 잊어버리려고 우리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히스테리컬하게 집착한다. 돈, 명예, 디지털 세계, 멍청한 인간 중에는 스스로를 갉아먹는 마약 따위로 말이다.
한때 주체하지 못해 나대던 야욕이 불러일으킨 소요는 치명적이었고 괴로움은 만성적이었다. 자기 자신이 고통의 근원임을 자인하기까지 부인하고 분노하며 타협하다 우울해지는 곡절은 필연이었다. 눈치챘는가? '내가 나를 알기'까지 거쳐온 지난한 감정적 행로는 저 유명한 엘리자베스 로스가 밝힌 <죽음의 5단계> 이론에 다름아니었음이니. 하여 죽었다 다시 살아온 자는 전철前轍을 되풀이할 유혹의 마수 앞에서 초연해질 만큼 마음은 이미 각성했다.
이쯤되면 허무란 소란도 소거하는 게 어렵지 않다. 방법은 의외로 간단할 성싶다.
나를 나로 알아 내 삶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주문처럼 끊임없이 되뇌이고 고요히 행한다. 세상이 부여한 분수만큼만 누리다가 평온하게 저문다면 그것이 곧 마음의 평화apatheia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