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활동을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능력과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 건강상태가 노년기 삶의 질을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건국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홍준 교수 연구팀은 65세 이상 노인 4317명을 대상으로 한 국민건강영양조사 자료를 활용해 노인의 삶의 질을 평가한 연구를 최근 발표했다. 연구진은 건강과 관련된 삶의 질을 평가하는 측정 도구인 ‘EQ-5D’를 통해 노인의 운동, 자기관리, 일상 활동, 통증·불편감, 우울·불안 등 5가지 영역에 걸쳐 네트워크 분석을 시행했다.
연구 결과, 노인의 삶의 질을 평가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로 ‘일상 활동의 독립적 수행’이 꼽혔다. 네트워크 분석은 ‘노드’라 부르는 각 요소 사이의 연결망을 분석해 어떤 요소가 가장 중심되는 요인인지를 평가하는데, 이 연구에서는 가장 중심성이 높은 노드로 해당 요소가 지목됐다. 전홍준 교수는 “연구 결과는 노인의 삶에서 일상 활동의 독립적 수행이 얼마나 원활한가에 따라 다른 요소들도 영향을 많이 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노인이 일상생활을 스스로 수행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전체적인 삶의 질을 향상하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점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삶의 질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외부 요인 중에서는 ‘스스로 느끼는 주관적 건강상태’가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치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혈압·당뇨병 등 만성질환의 수, 경제적 수준, 교육 수준, 음주나 흡연, 운동, 스트레스 등 여러 외부 요인을 함께 분석 대상에 포함해 나온 결론이다. 자신의 건강상태에 대한 스스로의 평가가 삶의 질과 가장 높은 관련성을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 교수는 “이번 연구 결과가 노인 복지 및 건강관리 정책의 방향성을 결정하는 데 중요한 의미가 될 것”이라며 “노인들이 건강관리 전략을 스스로 수립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밝혔다. (<행복한 노년의 요소>, 경향신문, 2023.09.15)
염색만 바른다기에 다음에는 커트도 같이 하는 건 어떠냐고 슬쩍 떠봤다. 나이 가늠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깎새 부친보다는 터울이 아래로 져 보이는 로맨스그레이는 그걸 왜 이제서야 물어보냐는 듯 말꼬리를 냅다 채어 갔다. 뻗치는 머리카락이라서 커트 대신 두 달에 한 번꼴로 단골 미장원엘 들러 펌을 한다고 대꾸했다. 그동안 염색을 도맡았던 안주인이 귀찮아하기도 하고 용돈벌이하느라 시간도 안 나 염색방에나 가래서 여기 와서 이렇게 염색보 두르고 앉아 있다고 덧붙이면서. 3만 원하는 미장원 펌이 부담스럽지 않냐고 물었더니 돌아오는 답은 로맨스그레이가 누리는 안온한 여생에 대한 공치사였다.
한때는 벌인 사업이 번창해 큰돈을 만져 봤고 호사다마라고 사기를 당해 뼈아픈 실패도 맛보는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이었다. 사람이 굴곡이 심하면 죽을 때까지 고단해지겠다 겁이 덜컥 나서 그길로 모든 걸 정리하고 너누룩하게 여생을 즐길 방도를 물색하던 차에 개인택시를 낙점했단다. 몇 년 동안 화물차를 몰아 자격 조건을 갖춘 뒤 사업 정리하고 남은 돈 1억을 투자해 개인택시를 몰기 시작했다. 길눈이 어두웠던 초창기엔 길도 모르면서 택시를 모는 배짱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거냐는 비아냥을 듣기 일쑤여서 마음고생이 심했지만 10년쯤 몰았더니 지금은 눈 감고도 갈 만치 노련해졌다.
자기가 세운 원칙에 대단히 완고했다. 아침에 나갔다가 저녁 식사 전까진 운행을 종료해 결코 무리하지 않는다. 야간 운행하다 받는 스트레스, 이를테면 취객과 실랑이를 벌여 생길 감정 소모를 아예 차단하는 게 신간이 편하다고 강조했다.
또 일주일에 이틀, 목요일과 일요일은 무조건 쉬는 날로 정해 즐겁게 놀기로 했단다. 술을 좋아해 목요일 전날은 평소보다 더 일찍 퇴근해 친구들과 어울려 마시고 놀곤 하는데 술맛이 그렇게 달 수가 없다나. 산을 또 좋아해서 노는 날마다 안 가는 산이 없으니 이보다 더 즐거울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안주인이 회를 유독 좋아해 단골 횟집 예약을 걸어 둘만의 오붓한 저녁 식사를 즐기기도 한다. 깎새가 이 대목에서 은근 매료됐다. 슬기로운 노년 생활의 전형이라고 할 만큼 매력적이라서.
어떻게 해야 당신처럼 유유자적한 일상을 영위할 수 있냐고 물었을 때 그런 일상을 감당할 수 있을 만한 경제적 여건 마련에 방점을 찍었다. 낮에만 택시 모는데 벌면 얼마를 벌겠냐고 되물었다. 기껏해야 100만 원, 많이 벌어야 150만 원. 거기에 연금을 합치면 월 250만 원 가량. 사위가 이뻐 돈까지 대주는 처갓집을 둔 아들내미 둘 다 제 집 마련해 따로 나가 살아 자식들 밑으로 돈 들어갈 일 없으니 그 정도로도 노부부 먹고 사는 데 지장 없이 여생을 남부럽지 않게 편히 보낼 자신이 있다고 했다.
볼일 다 마치고 점방을 나서는 손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깎새가 로맨스그레이 나이쯤 되었을 때 과연 그처럼 재미지게 노년을 구가할 수 있을지 실없이 비교해본다. 깎새를 평생 업으로 삼았으니 늙어서도 계속 일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개인택시 모는 로맨스그레이나 별반 차이는 없겠다. 깎새도 저녁은 집에서 먹으니 일하는 방식 또한 다르지 않다. 다만 느긋하게 일상을 즐길 만큼 수입이 받쳐 줄 지는 현재까지는 미지수다. 원하는 수준까지 오르지 못하는 매상이 그렇고 소싯적에 빼먹은 보험료가 적지 않아서 나라에서 주는 연금액이 그리 크지는 않을 거니까. 아무리 사위가 이뻐도 집 살 목돈을 내주기는커녕 현 상태라면 딸애들 혼수 밑천 대기에도 빠듯하다. 정기적으로 만나 술 마시고 즐길 친구가 별로 없고 나이 들수록 취향, 기질이 더 안 맞는 마누라와 오붓한 외식을 즐기는 건 그 자체로 큰 도전이니 과연 깎새는 로맨스그레이처럼 안온한 노년을 즐길 수 있을까.
예컨대 개인택시 모는 로맨스그레이를 평균적인 노년상이라 본다면 지금 암만 아등바등한들 그 근처에도 못 갈 낙제생이 될 게 뻔한 깎새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깎새의 깎새에 의한 깎새를 위한 안온한 여생을 새로 설계하는 게 더 나을지 모른다. 남과 비교하면 뭐든 처지는 인간이 돌릴 수 있는 유일한 희망회로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