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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심을 속이지 말자

by 김대일

김영민 교수가 쓴 논어 에세이를 단행본으로 엮은 『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사회평론, 2019)에는 제러미 벤담이 제안한 파놉티콘panopticon 원리를 예로 들면서 가성비 높은 국가 통제력을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국가가 감시자에게 돈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시스템을 알려주겠다고. 싼값에 원하는 통제를 손에 넣을 수 있다고. 그 방책이 바로 파놉티콘panopticon이다. 파놉티콘 건축 도면에 따르면, 원형 건물 안에 갇힌 수감자들은 중앙 감시탑 안을 볼 수 없는 반면, 중앙 감시탑에서는 원형 감옥 안의 모든 걸 볼 수 있다. 이러한 건축 양식으로 말미암아, 수감자들은 누가 감시하는진 몰라도 늘 자신이 감시받을 수 있다고 느낀다. 그리하여 스스로 조심하고 자신을 통제한다.

푸코가 강조하고 있듯이, 파놉티콘의 장점은 그 가성비에 있다. 파놉티콘은 "감각보다는 상상을 자극하며 그 감시 테두리 안에서 항상 어디든지 존재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에게 수백 명의 사람을 맡긴다." 어쩌면 단 한 사람의 감시자도 필요 없을지 모른다. 밖에서는 파놉티콘의 감시탑 안을 볼 수 없으므로, 감시자가 설령 자리에 없다 해도 마치 거기 있는 것 같은 효과를 내므로. 감시자는 "유령처럼 군림한다."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므로, 누가 권력을 쥐고 있는가 혹은 그가 인仁과 같은 덕성을 갖추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중요하지 않다.(『우리가 간신히 희망할 수 있는 것』, 165~166쪽)


이에 반해 『논어』에는 이웃 간의 감시 시스템이나 국가의 물리적 통제력 강화를 옹호하는 부분은 없고 대신 자기 감시 혹은 자기 통제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언명은 여럿 있다고 했다. 다만 파놉티콘의 수감자들은 볼 수 없는 중앙탑 내부 대신 자기 스스로를 들여다보고 통제하며 혹시라도 감시당하고 있을까 봐 알아서 기는 건 파놉티콘의 세계나 논어의 세계나 다를 바 없음에도 파놉티콘이 자기 감시의 메커니즘을 외부에서 강제하는 장치인 데 반해 공자가 말한 자기반성은 통치 엘리트 자신이 자신에게 가하는 통제라는 점에서 분명 다르다.


자성이란, 세끼 밥을 통해 자신에게 영양을 주는 행위나, 막연히 몽상에 빠져 있는 일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자신의 못남을 탐색하는 행위, 즉 자기 파괴적 속성이 있는 행위이다. 자신의 못남을 탐색하는 행위는 고통스럽지만, 스스로 부과하는 고통이라는 면에서 국가가 가하는 고통과는 다르다.

공자는 제국의 신민으로서 자성을 생각한 것은 아니었으나, 후대에 성립된 중국 제국은 자성이라는 아이디어를 활용한다. 신민들이 양심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통제를 하기를 기대한 것이다. 명나라 때 사상가이자 반란진압군 수장이었던 왕양명王陽明이 그러한 양심의 자기 통제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자 한 인물이었다.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이 반란을 진압한 지역에서. 국가 행정력이 불충분하여 적절한 치안을 제공하기 어려운 곳에서 차선책으로 고려할 수 있었던 것이, 사람이라면 모두 가지고 있다는 '양심'이었던 것이다. 국가의 힘이 충분히 미치지 않는 곳에서마저 사람들이 양심을 발휘하여 스스로 질서를 이루고 살아준다면, 국가 입장에서야 얼마나 좋겠는가. 가성비 좋은 질서 유지는 국가의 오랜 꿈이다.(같은 책, 169~170쪽)


저자는 국가의 그러한 꿈이 21세기 대한민국 수도 서울 마포구에서 발견되었고 그것이야말로 21세기 한국형 파놉티콘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마포구에 위치한 어느 길목에는 사람들이 종종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곳이 있다. 이에 참다 못한 공무원들은 큰 거울을 달아 놓고 거기에 붉은 글씨로 "당신의 양심"이라고 써 놓았다. 왜 양심 혹은 가슴은 늘 붉은색인가. 하여튼, 이곳에 몰래 쓰레기를 버리러 온 사람은 그 큰 거울을 마주 보게 되며, 그 거울 속에는 쓰레기를 버려는 자신이 비치게 된다. 당신의 양심이라는 크고 붉은 글씨와 함께. 이것은 21세기 한국형 파놉티콘이 아닐까. 쓰레기를 버리려고 이 자리에 온 사람은 감시자를 보는 대신, 쓰레기를 손에 든 자기 자신을 본다. 할 수 없이 본다. 이 역시 외부 메커니즘을 통해 강제된 자기 통제이며, 그런 점에서 마포구의 쓰레기 투기 지역 큰 거울은 자기 감시의 메커니즈을 강제하는 장치이다.(같은 책, 170~171쪽)


두어 주 전에 깎새 점방 앞에다 누가 플라스틱을 무단으로 투기했었다. 깎새 점방 건물과 바로 이웃한 카센터 건물 안주인인 통장 아줌마가 득달같이 달려와 추궁했다. 당연히 안 버렸다. 왜? 플라스틱이나 비닐 같은 재활용쓰레기는 부친 점방 김군이 와서 가져가고 깎새는 머리카락 따위 일반쓰레기를 규격 봉투에 담아 지정된 요일에만 버리니까. 깎새 점방 앞이니 깎새를 의심하는 게 당연하겠거니 이해하려 애썼지만 섭섭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개업한 지 3년이 다 된 이웃을 모른단 말인가. 점입가경은 따로 있었다. 건물주 아줌마까지 버선발로 달려와서 추궁하는 게 아닌가. 통장 아줌마와 건물주 아줌마가 앙숙인 건 두 번 말하면 입이 아플 지경이지만 깎새를 제물로 삼아 서로 힘겨루기를 하는 인상을 지울 길 없어 입맛이 썼다.

그리고 엊그제 새벽, 누군가 깎새 점방 앞에다 규격 쓰레기봉투가 아닌 큰 비닐에다 갖가지 쓰레기를 담아 또 무단 투기했다. 흰 비닐에 비친 검은색 물체가 언뜻 사람 머리카락으로 보여 오늘은 오해를 단단히 사겠다 싶어 골머리를 앓았다. 마침 청소 중인 구청 소속 환경미화원이 눈에 들어오자 조언을 구하려고 곧장 그에게 달려갔다. 재발 방지 뿐만 아니라 양심에 털이 난 무단 투기자를 정서적으로 응징하는 차원에서라도 구청에서 조사가 나오게 직접 신고를 하는 게 상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통장 아줌마가 카센터 문을 여는 기척이 들리자마자 후딱 달려가 오늘 쓰레기도 자기가 절대 버리지 않았다고 일단 강변한 뒤 환경미화원에게서 들은 조언을 고스란히 알려 줬다. 두어 주 전 사건 때문인지 통장 아줌마는 제법 친절한 척 깎새 결백을 믿는다면서 깎새 대신 자기가 주민자치센터를 통해 신고하겠다고까지 했다.

이로써 이날 사건은 일단락되는 줄 알았다. 깎새 점방 건물과 통장 아줌마 건물 사이 조붓한 골목에 주차해 둔 SUV를 큰길로 빼려고 나타난 깎새 점방 건물 바깥주인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깎새는 바깥주인의 아내이면서 건물주인 아줌마가 전후 사정도 모른 채 또 트집을 잡을지 모른다는 염려가 퍼뜩 들어 바깥주인을 붙잡고 똑같은 소리를 입이 아프게 되풀이하려 했다. 그러자 바깥주인 사태를 다 알고 있다는 듯이 회심의 한 마디를 꺼내 들었다.

"어제 저녁 저 집(카센터 안주인이자 통장인 아줌마 건물) 2층에 세 들어 사는 남자가 버린 걸 내가 봤어."

통장 아줌마 동공이 심하게 흔들리던데 되묻는 목소리까지 떨렸다.

"우리집 2층 총각이?"

반전은 한순간이었지만 두 집 간 암투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깎새는 그저 모든 오해가 풀려 홀가분할 따름이었다. 김영민 교수 에세이와 이날 해프닝이 무슨 연관이 있느냐고 묻는다면 여태 끼적거린 깎새조차 둘러댈 게 별로 없다. 그래도 굳이 찾는다면 이거다.

양심을 속이지 말자!

오늘의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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