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무일인 화요일 저녁에 만나 술 퍼마시다 다음날 작취미성昨醉未醒이면 손님 귀 자를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는 친구 엄살을 받아들여 부산 볼일은 정작 화요일 오후임에도 전날인 월요일에 서울에서 날아와 술 받아준 박가는 참 고마운 친구다. 유명 투자신탁회사 본부장 직함을 달고 서울 여의도를 주름잡는 녀석도 녀석이지만 그 마누라도 증권회사 직원으로 잔뼈가 굵어 형편으로 따지면 깎새와 비교할 바 못 되니 부산에 손님으로 와도 박가가 술 사고 안주 사고 다 한다.
아무튼, 지지난 주 월요일 저녁 서면 한 횟집에 나란히 앉아 주거니 받거니 소주잔을 기울이던 와중에 녀석이 불쑥,
"야, 내 마누라도 니 동생 잘 알더라. 증권가에서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긴 하지."
뉴스로 가끔 접하긴 하지만 막상 서울 증권가에서도 이름이 오르내린다고 하니 생각했던 것보다 더 대단한가 보다 우쭐거릴 만도 하지만 이내 무디어지는 깎새. 다니는 대기업에서 임원으로 승진을 하고 제가 맡은 분야에서 낭중지추를 숨기지 못하는지 관련 분야 뉴스에 꼬박꼬박 등장해 부모가 자랑스러워하는 동생인지라 그런 녀석이 대견한 건 분명 맞는데도 그럴수록 거리감은 더 아득해지는 깎새. 아무리 한 어머니 뱃속에서 났다 하더라도 감정의 골이 깊어지면 어느덧 남남일 수밖에 없는 사이. 동생이라고 하면 깍새는 그렇게 만감이 서린다.
두 살 터울인 형제는 어렸을 때부터 썩 우애가 깊었던 건 아니다. 둘 다 내성적인데다 말수까지 별로 없어 누가 보면 형제가 맞나 싶을 만치 데면데면했다. 부산에서 형이 대학교를 다닐 때 동생은 서울로 유학을 가는 바람에 실낱같이 이어지던 형제애마저 흐물흐물해졌다. 형이 직장 생활로 상경했을 때 마침 제대 후 복학한 동생과 나중에 계수가 될 여자친구는 한데 어울리며 모처럼 훈훈한 기운이 돈 적이 있었지만 동생 여자친구가 학교 동기라면서 형에게 소개해 준 여자가 1년 열애 끝에 잠수 이별을 해 버리자 짧았던 화기애애도 산산조각이 나 버렸다.
그렇게 형제이지만 남남처럼 산 나날이 쌓여 갔다. 낙향한 형이 건드는 족족 말아먹어 뒤웅박 신세를 못 면하자 동생한테 손 벌리기 일쑤였고 동생은 차라리 밑 빠진 독에 물을 붓지 사람이 할 짓이냐며 제 형수한테 절연을 단호하게 선언했다. 처신 바른 시동생이 오죽하면 저럴까 이해하면서도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버틴 마누라는 혼자 망하면 됐지 왜 자기까지 비참하게 만드냐면서 남편을 야속해했다. 그 일이 빌미가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댁과는 감정적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는 마누라다. 맏며느리로 해야 할 최소한의 책무만 이행할 뿐.
형제 사이에 벌어진 감정의 해자는 깊고도 넓다. 특정한 사건 때문에 그 지경에 이르렀다고 여기는 건 순진한 발상이다. 끝을 알 수 없는 괴리의 터널은 늘 상존했다. 그로 인해 관계는 격절되고 불신과 오해를 낳았으며 결국 사소한 사건으로 발화되어 가족이라는 허약한 뼈대를 일순 뒤흔들었을 뿐이다. 예정된 파국이었던 것이다. 앞으로 형제 사이에 의미있는 의기투합을 기대하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데면데면한 감정선을 유지한 채 서로의 영역에 간섭하지 않고 가까운 듯 먼 듯한 거리를 유지하는 게 서로가 서로를 위하는 처신이겠다.
스물다섯 먹은 언니와 열아홉 고3 동생은 사이가 무척 좋다. 같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건 침대에 널부러져 수다를 떨건 언제 어디서나 깨가 쏟아진다. 으르렁거리다 못해 서로 못 잡아 먹어 안달이 난 드라마 속 자매와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자매 우애가 깊은 건 여섯 살 터울이 완충작용을 한 덕분이라고 여기는 깎새다. 여섯 살이나 많은 언니한테 동생은 무척 고분고분하다. 언니라는 존재를 알면서부터 제 언니 나잇값을 두려워한 까닭이겠다. 동생이 순순한 만큼 언니도 동생을 유순하게 대한다. 오뉴월 하루볕이 어디냐고 유세 부릴 만도 한데 동생 구박하는 걸 단 한 번도 본 적 없다. 오히려 스스럼없어 하는 언니를 동생이 말리면 말렸지.
둘 다 타고난 천성이 수더분한 데다 수틀리면 발끈부터 하는 불뚝성질 어미가 무서워서라도 불미스러운 짓을 자초하지는 않는다. 머리가 굵어질수록 자매 우애가 더 돈독해지고 서로를 위하는 품까지 아기자기해서 그런 녀석들을 보는 낙에 아비는 그나마 살맛이 나는 게다. 자매가 이대로 안 변하길 바랄 뿐이다. 살다 보면 세상 풍파를 으레 겪을 테지만 벅찬 줄 뻔히 알면서 혼자서 아등바등하다 탈진해 버리는 어리석음만은 범하지 말았으면 한다. 설령 큰 힘이 되지 못할지라도 지친 몸뚱아리 잠시나마 기댈 수 있는 정서적 피난처로 내 언니, 내 동생을 꿍쳐 둔 비상금인 양 소중하게 여기면 더 바랄 게 없는 깎새다. 그러지 못하는 아비를 대속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