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쓸 때 난감했던 적이 있었다. 이를테면 어떤 여자를 만나 서로 죽고 못 살 만큼 사랑을 하다가 여자가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바람에 그 트라우마로 남자가 오랫동안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을 묘사하자니 장황할수록 사람이 구질구질해지다 못해 자괴감에 억눌려 글 진도가 더딘 경험 말이다. 세상을 떠도는 말들이 부지기수인데 그런 상황을 직관적으로 표현할 변변한 낱말 하나 없다는 데 애석해하던 차에 가리늦게 딱 어울리는 걸 발견하게 됐으니, 이른바 '잠수 이별'이 그것이다. '잠수 이별'은 국어사전에 정식으로 등록되어 있진 않지만 당대에 유행하는 말, 즉 시쳇말로써 효력을 발하고 있다. '자취를 감추고 연락을 끊는 방식으로 상대와 헤어짐'이란 뜻으로.
상황을 일목요연하게 그려내는 낱말을 발견한 덕에 소리 소문도 없이 자취를 감추는 헤어짐에 관한 글을 한결 수월하게 쓸 수 있게 되었으니 한시름 놓았다. 말 타면 경마 잡히고 싶다 했던가. 이제부터는 '잠수 이별'을 당한 쪽이 아니라 그걸 감행한 쪽으로 빙의해 글을 써보고 싶은 욕심이 불쑥불쑥 드는 것이다. 그러자면 이별을 잠적으로 대신한 쪽 심리부터 탐색해야겠는데, 의외로 심도 있는 자료가 별로 없다. 기껏 심리학과 교수들 짧은 견해를 실은 신문 기사가 전부라. 아쉬우나마 그거라도 일단 밑천 삼아 사람에 대한 예의라고는 눈 씻고 찾아볼 수 없는 이기주의자를 어떻게 단죄할지 궁리해 보려 한다.
건실했으나 마음 여린 남자는 정을 주는 족족 사라지는 여자들을 향해 분노했지만 끝내 그렇게밖에는 할 수 없었던 어떤 사정(그게 무엇인지도 모르면서)을 이해하려 들었다. 하지만 누가 누구를 이해한단 말인가. 이해하려 애를 쓸수록 마음은 점점 피폐해지고 세상 뭇 여자들이 남자를 조롱하는 성싶어 힘겨웠다. 사라진 여자들이 싸질러 놓고 간 트라우마를 짊어지고 평생 살아야 할 팔자일지 모른다는 공포는 의외로 가공해서 멀쩡한 여자와 결혼해 눈에 넣어도 안 아픈 두 딸 낳아 평범하게 잘 살고 있는 지금에 이르러서조차 '도대체 왜?'라는 의문이 악몽처럼 불쑥 떠오르면 어김없이 가위눌려 헤어나오기가 쉽지 않다.
이제 눈치챘는가? '잠수 이별'이란 일종의 계시다. 그걸 통해 깎새는 트라우마를 벗어날 힘을 얻으려 한다. 하여 수십 년 간 견디기 힘든 죄책감과 자괴감에 시달리게 한 사라진 여인들을 향한 응징, 즉 글로써 그들을 제재하려는 비질란티즘을 구현할 가능성을 찾고자 한다. 지난 수십 년 간 이어졌던 고약했던 애증을 박살낼 호기이길 진심으로 바라면서.
<'헤어지자' 말 한 마디 없이... '잠수 이별' 하는 이유> 기사 요약 (헬스조선, 2023.06.21)
- 잠수이별을 당해본 사람은 하나같이 ‘최악의 이별 방법’이라고 입을 모은다. 그래도 한때 사랑했던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되는 데다, 수많은 궁금증이 미제(未濟)로 남는다는 이유에서다. 연애는 두 사람이 했지만, 이별의 원인은 오직 한 사람만 알고 있다.
- 잠수이별은 대부분 우발적인 결정이나 행동이 아니다. 잠수이별을 선택한 당사자 입장에서는 그렇다. 꽤 오랜 기간 크고 작은 다툼, 또는 상대방의 어떤 모습들을 지켜보는 과정에서 속으로 몇 번씩 ‘헤어질 결심’을 했을 가능성이 크다. 생각을 겉으로 드러내지 않았을 수 있고, 드러냈으나 상대방이 눈치 채지 못했을 수도 있다.
- 결심 끝에 ‘잠수’라는 방법을 선택한 데는 여러 심리적 요인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별을 통보하면서 미안함, 부담감과 같은 부정적 감정을 느끼지 않으려 했던 것일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납득시키는 것 자체가 어렵거나 불필요하다고 여겼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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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 교수는 “잠수이별은 거절하지 못하는 심리와 비슷하다”며 “상대에게 직접 헤어지자고 말할 때 느낄 수 있는 부담감과 미안함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에 잠수라는 방법을 택한다”고 말했다.
- 잠수이별의 이유가 단순히 미안함, 부담감 때문이라면 이는 이기적인 처사다. 심리학자들 또한 잠수이별을 선택하는 사람에게서 무책임함, 자기중심적 성향 등이 드러난다고 지적한다. 자신의 생각과 판단이 가장 중요하다보니, 그 대상이 연인이었다고 해도 상대방이 느낄 수 있는 감정들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곽 교수는 “자기중심적인 성향이 강하면 상대방이 힘들 수 있다는 건 고려하지 않고 이기적으로 자신만 생각할 수 있다”며 “한편으로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인해 헤어지자는 말을 하지 못하고 잠수라는 방법을 선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 단국대 심리학과 임명호 교수는 “잠수이별을 해본 사람은 다음에도 잠수이별을 선택할 확률이 높다”며 “잠시 죄책감을 느낀다고 해도, 결국 무의식적으로는 이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 잠수이별을 당한 사람에게는 이별이 슬픔 그 이상의 감정으로 다가온다. 갑작스러운 이별로 인해 심한 배신감, 분노 등을 느낄 수 있으며, 함께 한 시간이 한 순간에 사라지는 것에 대한 공허한 마음도 생긴다. 당시에 받았던 충격이 크다면 잠수이별 경험이 오랜 기간 트라우마로 남기도 한다. 임명호 교수는 “잠수이별을 당한 사람 입장에서는 이별이 끝맺지 못한 일처럼 계속 마음 속에 맴돌아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며 “이별의 원인을 모두 자신에게 돌리면 심리적으로 더 큰 죄책감을 느끼고 괴로워한다”고 말했다.
- 이별해야 한다면 어떤 방식으로든 상대방에게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맞다. 이유를 설명하고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게 어렵다면 이별 통보라도 해줘야 한다. 정상적으로 만나고 헤어지는 연인이라면 이 같은 과정이 한때 좋아했던 상대에 대한 예의이자 배려다. 곽금주 교수는 “잠수이별을 하는 순간 사랑했던 모든 시간이 무효가 된다”며 “연인관계를 좋게 마무리하는 건 성숙하게 사랑했던 나와 상대방, 그리고 둘이 함께한 과거 시간에 대한 예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