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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일수록 의례가 필요하다

by 김대일

3주 전, 휴무일인 화요일 저녁에 만나 술 퍼마시다 다음날 작취미성昨醉未醒이면 손님 귀 자를 불상사가 생길 수 있다는 친구 엄살을 받아들여 부산 볼일은 정작 화요일 오후임에도 전날인 월요일에 서울에서 날아와 술 받아준 고마운 박가와는 대학 시절 ROTC 후보생으로 처음 만났다. 손가락 꼽아 보니 30년이 넘는 인연이다. 안면을 트자마자 쿵짝이 잘 맞았다. 살짝 이기적인 면이 거슬렸지만 개성이겠거니 눈감았다. 강원도 동북부 산간 오지에서 쎄가 빠지게 군생활한 것도 모자라 첫 직장도 같은 회사에서 시작은 했지만 이후로는 처지가 완전히 갈렸다. 뒤웅박 신세를 전전하다 천신만고 끝에 이발사 길로 들어선 깎새와는 달리 국내 유수의 투신사 본부장으로 승승장구한 박가는 남부럽지 않은 중년이 되었다. 노는 물이 달라 별로 어울릴 것 같지 않아 보이지만 아주 가끔 만나 대작할라치면 제법 거리낌이 없다.

그런 둘 사이에도 절교를 예고한 냉랭한 기류가 한동안 흘렀던 적이 있었더랬다. 나락의 바닥을 벅벅 기는 나날이 이어지던 시절, 열등감과 열패감 따위 비참한 감정에 휘둘리던 깎새가 과민반응을 일으킨 측면이 크지만 그 빌미는 박가가 제공한 게 맞다. 그때 확고부동한 소신 하나가 생겼다. 친구일수록 의례가 필요하다고.

부산 민락동에서 포장마차를 꾸리던 시절이었으니까 10년이 훌쩍 넘었다. 서울 여의도 증권가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박가가 부산 한적한 포구 한 귀퉁이에 자리한 궁상맞은 포장마차로 납시겠다는 약속을 해와 그저 황감할 따름이었다. 격이 안 맞으면 암만 친구 사이라도 모양이 빠지는 법이거늘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사는 포장마차 주인을 친구랍시고 여전히 대우해 주는 게 고마워서 박가가 내려온다는 날을 달력에다가 대문짝만하게 표시를 해두고 고대했다. 그가 오는 날은 무리를 해서라도 자연산 회를 떠놓겠다, 장어구이보다는 보양식이라는 장어탕이 나을 것이다, 가리비는 됐고 전복을 사서 굽고 죽도 끓여 놔야겠다며 그만을 위한 만찬 시나리오를 연일 펼쳤다 접었다 했다. 깎새에게 박가는 친구 이상이었다. 그가 상경하기 전까지 부산에서 쌍둥이 형제처럼 지냈다. 좌절하면 위로해줬고 다시 일어서면 진심어린 응원을 해주는 사이였다. 서로 의지가지했던 우애는 설령 각자의 처지가 달라졌다 해도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 깎새는 늘 확신했었다.

온다는 당일 오전에 박가로부터 오후 6시 전까지 업무를 마치겠다는 연락이 왔다. 오후 서너 시쯤 이번에는 깎새가 연락을 했다. 마지막 업무를 보려고 한 시중 은행 지점을 방문 중이라고 했다. 일상적인 업무니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했고 꼬붕이 붙어 다닌다고 했다. 딸린 식구 떼놓고 혼자 달랑 오지는 못할 테니 주안상은 삼 인분으로 준비해야겠다고 깎새는 고쳐 먹었다.

오후 6시가 넘었는데 연락이 없었다. 오후 7시에서 8시로 넘어가는데도 역시 연락이 없었다. 깎새가 연락을 해도 받지 않았다. 활어 직판장에 걸었던 회, 장어, 전복 예약을 취소했다. 그날따라 손님도 안 들었다. 혼자 맥주와 소주를 섞어 연거푸 들이켰다. 저녁 장사로 한창이어야 할 9시쯤 작파하고 집 근처 선술집에 처박혀 진탕 퍼마셨다. 다음 날 아침 박가로부터 문자가 왔다. 은행 직원들과 회식을 가졌는데 돌발적인 상황이어서 운신이 어려웠다, 오래 끌지는 않았지만 몹시 피곤했고 같이 온 일행을 배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잡아둔 숙소에 들어가 바로 잤다, 뭐 그런 내용.

문자를 확인한 뒤 깎새는 박가 연락처를 지워 버렸다. 박가 무심함이 괘씸한 건 차치하고 깎새 혼자서 착각한 행복의 허상이 발각된 듯한 수치심에 몸서리쳤고 그걸 적나라하게 까발린 박가가 고마웠지만 덧정마저 사라져서였다. 한동안 박가와는 완전히 두절한 채 지내다가 어떤 계기로 오해를 풀긴 했지만 털털해졌을진 몰라도 끈끈한 사이로 원상회복되었다고는 장담하지 못하겠다.

말머리에도 밝혔지만 그 일 이후로 깎새는 소신 하나가 생겨 전혀 흔들림이 없다. 나이를 먹을수록 허물없는 친구란 없다. 그런 친구는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법이고 현실은 각자 짊어진 사정에 매여 사는 이기주의자일 뿐이다. 그러니 서로 절충이 필요하다. 이쪽이 저쪽을 위하듯 저쪽도 이쪽을 배려해야 한다. 그러자면 친구일수록 의례가 필요하다.


언제나 같은 시각에 와 주는 게 좋아. 이를테면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난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네 시가 가까워 올수록 나는 점점 더 행복해지겠지. 그리고 네 시가 다 되었을 때 나는 안절부절못할 거야. 그래서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알게 되겠지! 그렇지만 아무 때나 온다면 나는 몇 시에 맞추어 내 마음을 단정해야 하는지 모르잖아. 의례儀禮가 필요해. (『어린 왕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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