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도지죄餘桃之罪는 『한비자』 <세난說難> 편에 나오는 고사다.
옛날 위衛나라에 미자하彌子瑕라는 미소년이 있었는데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위나라 법에 임금의 수레를 몰래 타는 자는 발을 자르도록 되어 있었다. 어느 날 밤, 미자하의 어머니가 병들었다는 소식에 미자하는 임금의 허락 없이 슬쩍 임금의 수레를 타고 나갔다.
한창 미자하를 총애하던 때라 임금은 이 일을 듣고 어머니를 위해 발 잘리는 벌도 잊었다고 그를 칭찬했다. 그리고 어느 날 미자하는 임금과 함께 정원에서 노닐다가 복숭아를 따서 먹게 되었다. 맛이 아주 달아서 나머지 반쪽을 임금에게 먹으라고 주자,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준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미자하의 미색이 쇠하자 임금의 총애도 식었다. 한번은 미자하가 임금에게 죄를 지었다. 이때 임금은 이렇게 말하며 벌을 내렸다.
“미자하는 본래 성품이 좋지 못한 녀석이다. 과인의 수레를 몰래 훔쳐 타기도 하고, 또 일찍이 먹던 복숭아를 과인에게 먹으라고 한 적도 있다.”(<김원중의 한자로 읽는 고전>, 동아일보, 2012.05.23 에서)
이 고사 직후 ‘역린逆鱗’, 즉 군주의 노여움을 건드리지 않아야 성공적인 유세라고 한 한비 충고를 들어 군주에게 간언하고 설득하려는 자는 군주가 자기를 사랑하는지, 미워하는지 살펴보고 나서 해야 한다(김원중)고 주장하지만 깎새는 고사를 통해 사람은 변하는 존재인지 변하지 않는 존재인지를 고민하는 계기로 삼는다.
사랑은 변하고 미움도 변한다. 영원한 갑이 없듯 영원한 을도 없다.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을 기해 권력의 무상함도 새삼 깨달았다. 즉, 영원한 것은 없고 세상 만물은 변하기 마련인데 변하지 않는다는 신념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 그럼에도 우리는 그조차도 품고 가야 한다. 공존이야말로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정희진이 역설하듯 말이다.(<정희진의 낯선 사이>, 경향신문, 2025.03.19에서)
여기 변하지 않는다고 비판하는 자 또한 변하지 않은 것이라고 비난하는 신형철의 글이 있다. 글은 미자하의 여도지죄를 현대적으로 해석한 글이다. 함께 읽기를 바란다.
쉽게 변하지 않는 인간
신형철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비슷한 사람과 사랑에 빠지고 또 비슷한 이유로 상처받는다. 실수라 간주하며 이를 악물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기 일쑤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지만 두 번의 실수는 용납하지 않겠다”는 말을 그토록 자주 하고 또 듣게 되는 것은 같은 실수를 두 번 반복하는 사람이 그만큼 많기 때문일 것이다. 한 인간의 성격이 언제 결정되는지 나는 모른다. 여하튼 어느 시기에 한 사람의 내면이 시멘트처럼 굳어져 성격이라는 것이 형성되면, 성격의 결함은 그 시멘트가 굳기 전에 찍힌 발자국처럼 좀체 지워지지(교정되지) 않는다.
‘성격이 곧 운명이다’라는 말이 출처 없이 자주 인용되곤 한다.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 선집>(아카넷, 2005)에 따르면 이 말은 스토바이오스의 <전집> 제4권에 헤라클레이토스가 한 말로 인용돼 있다. 원문은 이렇다. “인간에게는 성품(ethos)이 곧 수호신(daimon)이다.” 한 개인의 운명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진다는 것이 당대의 통념이었으나 이와 달리 헤라클레이토스는 한 사람이 오랜 기간 동안 형성해온 성품(성격)이 이후의 삶을 결정한다고 봤다. 운명이 신의 뜻이 아니라는 것은 기쁜 소식이지만, 내 운명이 결국 내 책임이라는 얘기니까 두려운 소식이다.
이런 반론도 가능할 것이다. 내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개별적인 상황마다 내가 내리는 판단이라고. 그리고 그 판단은 성격 따위에 의해서가 아니라 지극히 합리적인 추론과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좋겠지만 늘 그렇지는 않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안다. “우리는 믿어야 할 충분한 이유를 발견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이미 믿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을 입증해줄 이유들을 발견하는 것이다.”(슬라보예 지젝,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근거가 믿음을 낳는 것이 아니라면, 믿음은 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결국 성격이 운명인 것인가.
비슷한 말을 미국의 사회운동가 파커 J 파머도 했다. “깊이 간직하고 있는 신념과 충돌하는 사실을 제시하면 사람들은 신념을 바꾸기보다 그 신념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물론 이는 우리의 상식과 어긋나지만 여러 조사 결과는 일관성 있게 그것을 증명해준다. 경제적으로 상층으로 올라서려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온 사람들에게 수입의 불평등을 드러내는 도표를 제시해 보라. 그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보다 당신을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라고 부를 가능성이 크다.”(<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 새로운 얘기는 아니지만 다시 지난 선거를 떠올리게 된다.
그러니 내가 지금의 나와는 다른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이것은 예전부터 시인들이 자기 자신에게 부과해온 숙제이기도 했다.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는 그의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산다는 것은 타인이 되는 일이다.”(<불안의 책>) 이 문장 뒤에 그는 어제 느낀 것을 오늘도 느끼는 삶은 “어제 잃어버린 인생을 오늘 사는 송장이나 마찬가지”라고 적었다. 김수영은 어느 산문에서 자신의 시가 ‘딴 사람의 시’처럼 느껴지면 좋겠다고 한 뒤에 이렇게 적었다. “딴 사람 - 참 좋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 입을 맞춘다.”(‘생활의 극복’)
좀처럼 변하지 않는 누군가를 비판하기는 쉽다. 그러나 그 비판의 논리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면 비판하는 자 역시 변하지 않은 것이다. 남의 것은 답답한 아집이고 나의 것은 숭고한 신념인가. 사람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는 말을 요즘은 혀를 차며 하기보다는 자책하며 하게 된다. 테니슨의 시 ‘율리시스’에서 율리시스는 다시 길을 떠나며 외친다. “나는 인생을 찌꺼기까지 마시련다(I will drink Life to the lees).” 오늘은 이 구절이, 삶이라는 잔 위에 떠 있는 거품만 핥으며 살아가는, 변함없이 같은 자리에서 완강한 나를 힐난하는 말처럼 들린다. (경향신문, 2013.02.14 전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