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명

by 김대일

혼술을 즐기는 까닭을 이렇게 변명했다.


혼자 마시는 술이 맛있을 리 없다. 나는 원래 사람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한량이었다. 세월이 속절없듯 사람까지 속절없이 외톨이로 만들어버렸을진 몰라도 내가 사람을 멀리 하진 않았다. 그런 내가 혼술을 즐기는 건 도대체 어인 까닭인가. 언제부터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아마 내 형편이 빈 쭉정이가 된 무렵부터라는 짐작은 한다.

나는 천부적인 리스너listener였다. 대화 중엔 온 정신을 집중해 상대가 말하는 요점을 머릿속 기억칩에 오롯이 저장해 뒀다가 재회하는 자리에서 전에 그가 주워섬겼던 말들을 반추해 내서 지난 만남의 연장선상인 대화로 윤기 나게 유도하는 능력이 참으로 탁월했다. 그러한 세심한 배려는 우선, 관계를 더욱 돈독해지게 하는 노력의 일환이면서도 기실 속셈은 딴 데 있다. 나만큼 너도 내게 관심을 가져 달라는 기대가 밑바닥에 깔려 있다고나 할까. 하지만 내 열성에 비할 바 못 되는 시큰둥한 반응으로 일관하는 태도라는 게 그 자리에 사람만 달라질 뿐 마치 짜고 치는 고스톱처럼 하나같이 똑같아서 나중에는 차라리 목석에다 대고 씨부리지 내가 왜 이런 푸대접을 견뎌야 하나 지치다 질려 버리고 말았다.

사람들은 제 신변잡사만을 성마르게 늘어놓다가 내가 몇 마디 꺼낼라치면 듣고 싶은 것만 골라 듣고는 "오랜만에 봤는데 술이나 퍼뜩 마시자"며 대화 판을 일거에 뭉개버린다. '참담하다'는 말을 아는지? 옥편을 보고 쓴대도 차라리 그릴 판인 이 어려운 한자 단어는 '끔찍하고 절망적이다'란 뜻을 가지고 있다. 사람을 만나고 난 뒷끝은 늘 참담했다. '네 얘기를 들어줬으니 다음은 내 차례'가 처세술로는 깔끔하기 그지없는 상호작용이라고 한다면 내 대화 상대는 세상을 너무 이기적으로 사는 이들 같았다. 아니면 요령껏 맞춰 주면 그만일 것에 과몰입으로 일관하는 내가 불구이든가. 역지사지는 시대가 변해도 여전히 유효한 덕목이라고 믿는 내가 고루한 건지 들을 것만 듣는 사람들이 영악한 건지 당신 생각은 어떤가.

혼자서 잔을 기울이다 취기가 오르면 대학 시절이 문득문득 떠오른다.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던 학사주점은 <우리터>. 당시 흔하디 흔한 학사주점 중의 한 곳일 뿐인 거기를 삼십 년 세월의 더께를 헤집고 소환하는 까닭은 교감과 연대의 장소성으로 내게 깊이 각인되어 있기 때문이다. 조붓한 마호가니색 식탁에서 술잔을 기울이던 그 시절, 사람들과 허물없이 희노애락애오욕을 마구 공유했다. 제 딴에는 자못 심각했던 고민거리가 헤식은 농담과 악의 없는 빈정거림으로 희화화되긴 했어도 식어빠져 내팽개쳐진 안줏감 취급은 받지 않았다. 오히려 취한 척 상대방 고민에 대한 대안이나 위로를 성심껏 건네는 것으로 술자리를 갈무리하는 낭만으로 충만했다. 그때가 정말 그립다.

지금 나는 자의든 타의든 고립을 택했다. 혼자서 빛바랜 옛 추억의 꼬리나 붙들고 사는 지금 내 일상은 분명 퇴행적이다. 하지만 다시는 리스너로만 살고 싶지 않다는 결심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인간은 졸아도 혼자 졸고 죽어도 혼자 죽는다는 말처럼 영영 혼자일지언정.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면서 도대체 누가 머리를 깎아 주냐고 궁금해 미치는 손님들한테 이 사람이라고 알려주고 싶은 서면 최 원장은 사람 만나는 일을 극도로 꺼리는 은둔자로 변해 가는 깎새한테 "혼술까지 즐긴다니까 괜히 불안해지네요. 우울증 초기 증상처럼 보여서요"라고 걱정을 해와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은 것이다. 매일매일 점방 손님들 응대하기도 벅찬데 굳이 성가신 일을 또 만들 필요가 없지 않냐는 말까지 덧붙이긴 했지만, 역시 퇴행적이긴 하다.

작가의 이전글김장하는 어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