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 중 해 질 녘을 유난히 좋아하는 깎새다. 해가 질 무렵 저 언덕 너머 보이는 짐승의 실루엣이 친근한 개인지 사나운 늑대인지 분간할 수 없는 이른바 '개와 늑대의 시간', 어둠과 밝음의 불확실성이 사람을 혼란스럽게 만드는 바로 그 무렵이 깎새를 흥분시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완전한 것을 지극히 혐오하는 변태적 기질에서 비롯되었음이라. 그런 차원에서 실루엣이란 낱말도 좋아한다.
비슷한 시기, 파리 저잣거리에는 새로운 초상화 기법이 등장했다. 검정색 광택지에 프로필(얼굴의 측면상)을 오래내는 실루엣이다. 실루엣은 원래 사람 이름이었다. 루이 15세 때의 재무장관 에티엔 드 실루엣(1709~1767). 그는 부족한 국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기발한 세금을 발명했다. 사람이 숨쉬는 공기에도 세금을 물린다는 공기세다. 명분은 루이 15세의 은혜로 신선한 공기를 마실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통할 리 없었다. 실루엣은 장관이 된 지 4개우러 만에 물러났다. 실루엣, 그의 이름은 짧은 임기를 상징하며 '지나가는 그림자'를 뜻하게 됐다.
사람들은 어느새 그림자 모양의 프로필 초상화를 실루엣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김창길 기자의 사진공책>, 경향신문, 2018.09.14에서)
유래야 어떻든 명징하지 않고 묘연하다는 뜻에서 해 질 녘, 개와 늑대의 시간에 어슬렁거리는 실루엣 같은 세상 모든 존재를 깎새는 사랑한다. 꼭 자기 같아서.
시詩를 쓸 줄 모르는 깎새가 그 비스무리한 걸 써 본 적이 있다. 해 질 녘 시흥이 돋자 한번에 휘갈긴 게다. 어쭙잖은 건 하는 수 없지만 세상 미비된 모든 것에 경의를 표한다는 목적은 완수한 셈이라 충분히 만족한다.
해 뜰 녘 해 질 녘
막 해가 떠오른 동녘 하늘이나
석양마저 이울어 거무끄름해지는 서녘 하늘이나
완전이란 단어와는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 해도
대낮과 한밤에 비해 뉘앙스만은 결코 처지지 않는다
되레 더 오묘할는지
그러고 보면 불완전하다고 꼭 무능한 것만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