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 Homme Et Une Femme

by 김대일

정관 신도시 33평 아파트를 장만해 입주한 김은 각시만 구하면 된다. 반백 살 노총각한테 긴긴 밤은 고역 그 자체인데다 그 넓은 집에서 혼자 축구 놀이 할 거 아니라면 하루라도 빨리 천생연분을 만나야 하는데 쉽지가 않은 모양이다. 중신을 들까 고민하다 관뒀다. 술 대신 뺨 맞은 기억밖엔 없고 중매 제대로 안 섰다고 숫제 인연까지 끊은 독한 사람도 있어서 득보다 실이 더 많을 짓을 구태여 자청할 이유가 없어서다. 대책 없이 넓은 집을 구한 노총각 김은 후반생을 함께 즐길 짝을 과연 만날 수 있을까?

2년 전 사회복지공무원으로 전향한 김은 기간제 교사 시절보다는 확실히 안정적으로 보인다. 얼굴 때깔이 몰라보게 좋아졌고 입성은 전보다 훨씬 세련되게 변했다. 겉보기에는 구질구질한 구태를 벗겨냈을지 모르겠으나 그 이면에 여전히 묻어나는 침울과 그럴 수밖에 없게 만든 회한의 잔재가 말끔하게 정리되지 않았음을 나는 직감한다.

부산 아무개 여고에서의 3년은 결과적으로 김의 기간제 교사 인생의 끝물이었다. 기간제 교사는 경력과는 관계없이 나이가 들수록 활용도가 떨어진다. 뜨내기 생활일지언정 그마저도 불러 주지 않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불안정한 미래가 늘 김을 옥죄던 와중에 그 여고의 같은 과목을 맡은 한 정교사가 퇴직을 신청해 결원이 생기는 행운이 찾아왔다. 김이 배수진을 친 건 당연했다. 물론 김이 요행을 바랐던 건 아니다. 늘 그렇듯 김은 제 직분에 충실했고 학생들을 성심성의껏 대했다. 덕분에 교직원들 사이에서 신망이 두터워졌고 김의 고등학교 은사라는 교장의 설레발로 김은 정교사 발탁의 8부 능선을 훌쩍 넘어선 것 같은 착각을 했다. 막상 뚜껑을 열어 보니 서울 유수 사범대를 나온 경력도 일천한 새파란 애송이가 낙점됐고, 그제서야 자기는 토끼 다 잡아 필요없어져 삶아 먹히게 된 사냥개 신세나 다름없었다는 걸 깨닫자 교사라는 직업에 넌더리가 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정교사 불발로 일게 된 회의감이 그의 의식 전반을 지배했다는 데 있다. 그로 인해 당시 김과 제법 잘 어울렸던 같은 과 3년 후배인 그녀와의 관계에까지 직격으로 영향을 미쳤다. 역시 교사인 그녀는 전도유망한 정교사다. 교육행정에도 관심이 많아서 이후 교육청 장학사로도 근무하게 된다. 그녀가 김에게 마음이 갔던 건 김이 제대 후 복학해 같은 강의실에서 공부할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야 그저 밥 잘 사주는 친절한 선배 정도의 호감이었겠지만 함께 교직 생활을 하면서 어려운 여건에서도 우직하게 제 길을 가는 김에게서 연모의 정이 생겼을지 모를 일이다. 기를 쓰고 기간제를 탈피하려고 해도 뜻대로 안 되는 건 운이 나빠서이지 김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고 믿었을 게다. 물론 기간제인 김과 미래를 기약할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의논한 적은 없었지만 마음이 아주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리라.

하지만 그 일이 있고부터 김은 정을 떼려고 작정이나 한 듯 그녀한테 모질게 굴었다. 같은 과를 나온 선후배 교사들의 친목 모임에서 맥주밖에 먹을 줄 모르는 김이 고량주 두 병을 깐 뒤 그녀에게 내뱉은 험악한 소리가 그의 진심이 아님을 잘 알면서도 그녀로선 치유가 어려운 깊은 상처로 파인다. 하여 그녀는 김과의 정서적 종언을 고하고 만다. 그러고 몇 해 지나 김은 공무원이 되었다.

하루는 저녁 식사나 함께 하자고 김이 그녀에게 조심스레 연락했다. 그녀는 정중히 사양하면서 사귀는 사람이 있다고 말했다.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김은 무척 당황했다고 말한다. 김에게서 통화 내용을 좀 더 자세하게 듣고 난 뒤 내가 내린 결론은 그녀가 짐짓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속소설이나 멜로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진부한 수작이다. 물론 그러는 그녀가 이해가 간다. 그녀에게 상처를 준 김을 복수하는 차원일 수 있고 김이란 남자한테 만정이 떨어졌을 수도 있으니까. 허나 두 사람에게서 풍기는 뉘앙스(뭐라고 꼬집어 적시하기엔 애매한데 아직 청산되지 않고 서로 질척대는 듯한 묘한 그 무엇)만으로도 그녀와 김이 아예 단절된 것 같진 않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의 관계 복원에 일말의 가능성은 아직 있지 않을까.

김을 만난 뒤 밤 늦도록 고민을 했다. 내가 사랑의 메신저 노릇을 하면 어떨까 하고 말이다. 현재 그녀가 어디서 뭘 하는지는 안다. 그녀를 직접 만나기보다는 친구로서 김의 심정을 곡진하게 쓴 서신을 보내면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혼자서 벌컥벌컥 김칫국부터 마셔댔다. 하지만 관두기로 했다. 술 대신 뺨만 죽도록 얻어맞는 중매쟁이는 어찌어찌 견디겠지만 괜한 오지랖으로 30년지기 김과 인연마저 끊기고 싶진 않으니까. 무엇보다도 남녀 관계는 당사자들이 결자해지하는 게 맞다. 둘의 재결합을 진심으로 기원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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