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

by 김대일

최근 교양예능 프로그램에 등장한 한 인물이 참 반가웠다. 한동일은 동아시아 최초 바티칸 대법원 변호사이자 한때 라틴어 강의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고 그 여세로 『라틴어 수업』(흐름출판, 2017)이란 책을 내 일약 베스트셀러 작가로 유명해졌다. 책에는 실생활에 별 소용이 없고 어렵기만 한 라틴어 수업에 뜨겁게 호응하는 까닭을 저자 나름대로 분석한 대목이 있다.


학생들은 이 강의를 단순한 라틴어 수업이 아니라 '종합 인문 수업'에 가깝게 느꼈던 것입니다. 강의에서 라틴어뿐만 아니라 라틴어를 모어母語로 가진 많은 나라들의 역사, 문화, 법 등을 비롯해 그로부터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들을 총체적으로 다루다보니 그렇게 느끼는 모양이었습니다.(한동일, 『라틴어 수업』, 22~23쪽)


목석연하지 않는 한 살다 보면 격렬하게 용솟음치는 감정이 느닷없지만 그것을 어떻게 정의내려야 할지 몰라 답답할 때가 비일비재하다. 분명 한 줄기 단비처럼 성마른 성정을 촉촉히 적시지만 무어라 형용하지 못해 간과해 버리고 마는 안타까움. 그래도 그때 그 낯선 깨달음이 주는 여운은 대단해서 보다 바람직한 삶을 추구하기 위한 밑거름으로 삼기에 충분하다. 그런 의미에서 『라틴어 수업』은 깎새 마음 속에서 마구발방하던 깨달음을 구체화시켜 하나의 틀 속에다 차곡차곡 정리해 준 고마운 존재다. 타인의 안녕이 곧 나의 안녕임을 깨닫게 해준 'Si vales bene, valeo 당신이 잘 있으면, 나는 잘 있습니다'와 삶이란 자기 자신의 자아실현뿐 아니라 타인을 위한 준비 속에서 좀 더 완성될 수 있다는 'Do ut des 네가 주기 때문에 내가 준다'는 의미가 통하는 일화를 글로 쓰면서 특히 기댔던 문구들이었다. 브라운관에서나마 모처럼 본 저자가 반가워 『라틴어 수업』를 새삼 뒤적거리다가 예의 그 격렬한 감정이 느닷없이 또 샘솟았고 오랫동안 고심했던 걸 마침내 규정지을 수 있게 되었다.

노래를 품평하는 데 쏠쏠한 수사를 가르치는 학원이나 책이 있다면 당장이라도 등록하고 구입했을 게다. 열렬히 사랑하는 노래, 그 노래가 청자들에게 전하려는 메시지를 논하고 싶어도 표현이 달려 절망하기 일쑤였다. 그러니 미디어에 등장해 현란한 말주변으로 대중을 현혹시키는 이른바 대중음악평론가에 기댈 수밖에 없었다. 그 말이 실한지 아닌지 따지는 건 차치하고 말이다. 샤프가 부른 <연극이 끝난 후>를 어떻게 논하면 좋을까. 40년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그 매력이 전혀 퇴색되지 않은 명곡을 표현할 방법이 무엇일까. 낮고 묵직한 여성 리드 보컬이 재즈풍 선율을 하드캐리하는 노래가 전하려고 하는 속뜻은 과연 무엇일까. 인터넷을 뒤지고 뒤져 오래된 비평글 하나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겨우 건졌지만 여전히 허했다.


연세대, 성균관대, 숙명여대, 건국대, 경기대생으로 구성된 혼성 7인조 그룹 샤프의 '연극이 끝나고 난 후'는 대학가요제가 배출한 노래들 중에서 가장 멋진 곡이다. 참신함, 실험성, 가사, 멜로디, 화성, 가창력까지 이 노래는 당시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 완성했다고 보기 힘들 정도로 대중음악의 미학을 완벽에 가깝게 소유하고 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내 가요에선 자주 등장하지 않은 퍼커션 악기 봉고와 트윈 기타 시스템으로 퓨전 재즈와 월드뮤직까지도 포섭한 '연극이 끝나고 난 후'는 환호와 박수 갈채가 없는 연극 무대를 통해 인간의 궁극적인 쓸쓸함과 외로움을 자극한다. (<소승근의 원 히트 원더스>, 2014.10. 에서)


연극이 끝나고 나면 따라오는 허탈은 대학 시절 연극부 활동을 한 적이 있는 깎새로서는 충분히 공감하는 바이지만 노래가 꼭 그것만을 드러내려 한 건 아닌 성싶었다. 객석에 앉아 텅 빈 무대를 보는 관객 시점과 무대에 앉아 텅 빈 객석을 보는 배우 시점을 번갈아가면서 묘사하는 구성은 단순히 연극이 끝난 후 정경을 설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연극이라는 상징을 통해 뭔가를 더 진전시키려는 혐의가 짙다고 판단했다. 이 지점에서 라틴어 문구 하나는 무척 통찰적이다.


Post coitum omne animal triste est.

모든 동물은 성교 후에 우울하다.


저자는 이 문구를 이렇게 살폈다.


오늘날 이 명문을 우리 일상과 접목하면 "인간이 원하고 목표하던 사회적 지위나 명망을 취한 뒤 느끼는 감정은 만족이 아니라 우울함이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열정적으로 고대하던 순간이 격렬하게 지나가고 나면 인간은 허무함을 느낍니다. 대중의 갈채와 환호를 받는 연주자나 가수가 공연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홀로 있을 때 느끼는 감정이 바로 이 문장이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법의학 교수님은 이 문장을 말하면서 연예인들이 쉽게 향정신성 의약품에 노출되는 환경에 대해서도 설명했습니다.

(···)

'내가 원하는 것은 이거다'라고 생각해서 열심히 달려갔다가, 막상 이루고 나서야 자신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게 아니었다는 걸 깨닫기도 합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무엇에 기뻐하고 슬퍼하는지, 나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는 달려본 사람만이 압니다. 또 그게 내가 꿈꾸거나 상상했던 것처럼 대단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만큼 불필요한 집착이나 아집을 버릴 수도 있어요. 그만큼 내가 깊어지고 넓어지는 겁니다. (같은 책, 136~137쪽)


불완전한 완전을 꿈꾸는 깎새는 성취 뒤를 따라붙는 허망에 주목한다. 세상에 대단한 건 없으니 불필요한 집착이나 아집을 버리라는 충고야말로 <연극이 끝난 후>를 제대로 듣게 만드는 마중물이나 다름없다.


https://www.youtube.com/watch?v=QxQyMGZkD6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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